10년 뒤에 당신은 어떻게 일하고 싶나요?
"갑자기?? 퇴사한다고??? 어디로 이직하는데"
"지금은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밖에서 프로그램 제작도 하고 디지털 마케팅 일도 하려고"
".... 야, 넌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건데??? 커리어도 좀 생각해야지"
무슨 소린가.
나는 커리어를 너무 생각해서 탈이다.
하고 싶은 일은 꼭 덕업일치를 이루겠다는 그 생각.
근데 궁금하다.
당신은 언제까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살 텐가.
2021년 4월 5일부로 나는 처음으로 무소속 인간이 되었다.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서른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있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강력하게 소속되고 싶은 곳이 존재해왔다. 내가 합격했던 대학교가 그러했고, 생명과학부에서 전과했던 마케팅 학부가 그러하였으며, 5년 반 동안 다닌 두 곳의 회사가 그러했다.
첫 회사로 IT스타트업에 갈 때도 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곳에서 신입을 뽑지 않자 나는 8년 차 홍보담당 채용에 지원을 했다. 내 지원서를 보면서 어이없었을 텐데 감사하게도 퍼포먼스 마케팅 포지션으로 바꿔서 채용을 해주었다. 1년 반 동안 높은 러닝 커브를 그리던 시기가 지나자 브랜딩 관점의 성장이 필요해졌고, 늘 가고 싶어 했던 동경하는 광고회사로 이직을 했다. 운이 좋았다.
이 곳에서는 다양한 브랜드의 디지털 미디어 플래닝을 했다. 그러면서도 콘텐츠 기획과 제작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혼자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보다가 > 내부 프로젝트 TF로 범위를 넓혔고 > 브랜디드콘텐츠팀 제안을 드린 후 > 캠페인제작팀으로 팀 이동을 했다. 너무 좋은 회사여서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진심으로. 하지만 내 속에 있는 그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을 해결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커리어패스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디지털마케팅에서 다방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해주면 너무 고맙겠다. 실제로 5년 반 동안 나는 퍼포먼스/미디어 플래닝/콘텐츠 기획/제작을 해왔고 팀원들에게 아쉽지 않은 성과를 냈다. (아쉬웠다면... 정중히 사과드린다.) 그래도.. 퇴사 직후에 3년간 맡았던 클라이언트에게 불려 가 '너랑 일할 때 너무 만족스러워서 그 회사에 일을 더 주게 됐다'는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았으니 이것으로 조금은 믿어주면 좋겠다.
원하는 일을 발견하고 가까워져가고 있는데 굳이 잘 달리고 있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이유가 있을까.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에 주위 사람들부터 디렉터분들까지 다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이 시국에 굳이? 정확히 뭐할 건데? 대책은 있어? 밖에서 꼭 고생을 해봐야 할까?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명확히 대답을 할 순 없었지만
나를 회사 밖으로 나오게 만든 질문에는 분명 내 안에 선명한 대답이 있었다.
이 질문을 받아 본 적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아침 7시 반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질문을 받았다. 때는 지하철이 뚝섬유원지를 지나고 있었다. 이 구간에는 모두가 자연스레 창 밖을 보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서는 모니터만 보고 있으니까. 빛이 있을 때 풍경을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다. 지하철이 정거장으로 들어서고 빛이 반전되는 순간 내 푸석해진 얼굴이 창 안으로 비쳤다. 깜짝이야. 그때 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10년 뒤 너는 어떻게 일하고 싶어?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놈의 지옥철 없는 삶 좀 살아보고 싶다였으나 건설적인 대답으로 정리해보면 이러했다.
1.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프로젝트를 하며 살고 싶어
2. 따로, 또 같이 프로의 동료들끼리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멋지게 해내고 싶어
3. 일을 하면서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선명해지는 그런 일들을 하고 싶어
4. 일 외의 시간을 잘 확보해서 건강한 일상도 영유하고 싶어
5. 아 그리고 낮에는 응구(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싶어
나중에 이 개념이 프리에이전트로 일하는 방식인것을 알게됐다.
10년 뒤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건데?
10년 뒤에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해보고 싶은 일은 많았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일을 더 많이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1. 브랜드를 위한 웹프로그램/웹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어
2. 일에 관련된 개인 프로그램을 연재해보고 싶기도 해
3.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진행도 하고 싶고
4. 내 얘기가 꾹꾹 담긴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어
5. 내가 배운 디지털 마케팅으로 더 많은 브랜드를 돕고 싶고
6.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내 브랜드도 만들고 싶지
그럼 지금 상태에서 쭉 10년을 일하면 저렇게 일할 수 있어?
아니. 아니었다. 회사의 소속 유무의 문제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저 일들을 지금 하지 않으면 10년 뒤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분명 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멋진 CD가 되거나 CMO가 되는 것을 선망했다. 물론 되면 좋겠다. 근데 지금의 우선순위는 조금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건강한 일상이 유지되면 좋겠고, 내 하루를 내가 선택한 일과 사람과 시간들로 채워서 충만히 보냈으면 좋겠다. 보다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하면서도 독립적인 내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내 안에서 얘기했다.
그럼 너는 지금 뭘 해야 하지?
여기까지 독자분들이 스스로를 대입해서 읽었다면 아마 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무소속으로 2021을 살아보겠다는 것이었다. (프리워커나 인디펜던트워커 자유노동자 비스므리한거다.) 대신 딱 8개월간. 언제까지고 회사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조직으로 구성되어 일하고, 내가 조직을 만들기도 하며, 조직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단 8개월간 내게 실컷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하고 싶은 방향의 일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기회. 환상이 깨지거나 현실이 되거나 할 기회. 그리고.. 유치원 이후부터 서른까지 하루도 안 쉬고 무언가를 했으면 8개월 정도는 내 인생에 갭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지내도 내가 해온 5년 반의 커리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싶다. 땅에 떨어지는 경험은 결코 없다. 이 시기를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더 명확한 방향성을 정하게 되었다고, 더 밀도 있는 일과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결말을 꼭 들고 오고 싶다. 올해 12월 31일의 이 사람의 결말을 궁금해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