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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조 Sep 18. 2022

조선김밥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68

  김밥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들이 소울 푸드가 뭐냐고 물으면 항상 '김밥'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일들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항상 김밥을 찾는다. 국내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유명 김밥집을 꼭 찾아가려 한다. 그렇다고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먹는 건 아니다. 진짜 그냥 김밥을 좋아한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김밥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단골 김밥집이 많지는 않다. 김밥 자체를 좋아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집'을 물으면 항상 답하는 곳은 하나 있다. 안국동에 있는 "조선김밥"이다.


  처음 조선김밥을 찾은 건 소격동의 어느 골목(소격동 158-2, 현재 키즈나 바로 옆 건물)에 있었을 때다. 내 기억이 맞다면, Facebook에 올라온 '서울 5대 김밥집'류의 리스트를 보고 이곳을 모두 가보겠다 마음먹은 직후였다. 다른 장소들은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들이었다면, 조선김밥은 MMCA 서울관이 바로 옆에 있어 일정을 짜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미술관에 들렀다 가면 되겠다, 여기부터 가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제일 먼저 방문했었다.


  전시를 둘러본 후, 네이버 지도를 켜고 김밥집을 찾아갔음에도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그만큼 작은 가게였다. 위치도 골목 구석이기에 상점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면서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올리자 마침내 조선김밥이 보였다.

  매우 작은 가게였다. 바 테이블에는 5개 정도의 의자가 있었고, 방에 상이 3개 정도 놓여있었던 것 같다.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는데, 다행히 바에 혼자 앉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고,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작은 공간이 좋았다. 

  조선김밥을 시켰다.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길고 실한 김밥 한 줄이 나왔다. 꽃나물이 들어간 대표 메뉴 '조선김밥'은 나물 덕분에 식감이 조금 특이했다. 그리고 집에서 어머니가 싸준 것처럼 밥이 꾹꾹 눌려 담겨 있었다. 김밥만 먹어도 충분했지만, 밑반찬을 하나씩 곁들여 먹는 맛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끼 식사로 충분할 만큼 든든했다.

  빠르게 김밥을 먹어치우고, 계산을 하고 나오는 순간 결심했다. 이 루틴을 자주 가져가야겠다고.

조선김밥을 처음 방문했던 날, 조선김밥에 먹는 조선김밥 한 줄로 행복했다.


  그 이후로 MMCA 서울을 갈 때면 어김없이 조선김밥을 찾았다.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 김밥 하나와 국시, 또는 콩비지를 시켜서 먹었다.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주인아주머니와 아드님이 나누는 대화가 마치 친구네 집에 잠깐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그날 이후 종종 종업원들과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집에서 가족이 나누는 대화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간간히 포장해 가는 사람들이 와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협소한 공간에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그 공간을 함께 나누었다. 이 모든 순간이 너무 좋았다. 포근하고 따듯하게, 그 덕에 매번 배도, 감성도 채우고 나왔다. 미술관을 다녀온 후 배를 채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벽을 바라보는 바 테이블, 조선김밥 또는 오뎅김밥과 콩비지 또는 국시(비나 눈이 오는 날엔 어김없이). 최고의 조합.


  한 번은 친구들과 같이 가서 마침내 온돌방에 앉아 조선김밥, 오뎅김밥, 국시, 콩비지를 다 같이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매번 혼자 가다 보니 김밥 하나에 콩비지 또는 국시만 시켜 먹었던 게 내심 아쉬웠나 보다. 이게 뭐라고, 그날 무척이나 행복하고 즐겁게 식사를 했었다. 아직도 바닥에 앉아 김밥과 국시, 콩비지를 먹었던 그날의 잔상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다 직장인이 된 이후, 매년 5월 초가 되면 '서울여행' 콘셉트로 4~5일 내내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루틴이 생겼다.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고,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다 보니, 휴가를 하루 이틀만 쓰더라도 꽤 오랜 시간 여유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서울여행' 중 하루를 'Museum Day'로 정했는데, 이때 항상 MMCA 서울 10시 방문, 조선김밥에서 점심식사 후 다른 미술관 하나 또는 두 개 더 방문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그리고 매년 그날 오전은 모든 게 풍성하고 풍만한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같이 조선김밥을 찾아갔으나, 가게가 없어졌다. 문을 닫은 건가 했는데, 소격동에서 안국동으로 위치를 옮겼다. 멀리 간 건 아니고, 원래 있던 위치에서 이태리재 방향의 골목을 따라 나가면 더 넓은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제는 테이블도 많아 지인들을 데리고 갈 때 자리가 있을까 하는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김밥이 나오는 접시는 그대로지만 밑반찬이 나오는 접시가 조그마한 사각형 플라스틱 접시로 바뀌어 반찬 종류별로 따로따로 담겨 나온다. 분명히 예전보다 편리해지고 쾌적해졌다.

  하지만, 이제 과거 소격동 시절의 가게에서 느꼈던 정감을 느낄 수는 없는 듯하다. 나만 아는 동네 아지트 같은 느낌은 사라졌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김밥과 콩비지, 국시가 있고, 차분하고 따듯한 느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시간이 쌓이면 점점 더 애정이 가지 않을까. 그때와 같은 풍성함과 풍만함은 다시 느끼지 못하겠지만, 새로운 감정들로 다시 채워 나가야겠지.



  최근에 MMCA 서울관에서 故 이건희 회장님 소장품 특별전으로 '이중섭' 작가님 작품을 전시한 특별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중섭 화가님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터라 오랜만에 MMCA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조선김밥을 찾았다. 이제는 새로운 가게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2인 테이블에 앉아 조선김밥과 콩비지를 시켰다. 공깃밥은 안 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조선김밥이 먼저 나왔다. 돌솥에 보글보글 끓는 콩비지도 곧바로 나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사정 상 국시를 먹을 수 없어 아쉬웠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 가게에서만 채울 수 있는 행복은 여전했다. 그날도 혼자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두 가지 허기짐을 채우고 나왔다.


  다음에 또 MMCA 서울관에 놀러 가면, 혹은 안국동에 갈 일이 생기면 조선김밥에 갈 거다. 조만간 사람들과 같이 가서 모든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을 기회도 생겼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공간에 애정과 스토리를 쌓아가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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