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날, 한 달 살기의 1/3이 지났다. 감사하게도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다.
포도호텔에 있다 보니 모든 게 조금씩 느려진 느낌이다. 템포가 차분하게 늦춰지다 보니 심박도, 행동도 한 결 느긋해지고 쉼의 깊이도 더 깊어진다. 괜히 일찍 잠든 게 아니다. 일찍 일어나서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러한 전체적인 밸런스의 변화가 만들어낸 차이인 것 같다. 근데, 온천수가 진짜 뿌옇네?ㅎㅎㅎ
과거에는 호텔에서 조식을 잘 안 챙겨 먹었다. 여행을 떠나 2박이나 3박 이상 숙박하는 경우에도 일찍 일어나서 호텔 근처에 있는, 아침식사가 가능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사 먹는 편이다. 숙박비를 아끼려는 것도 있지만, 정해진 일정 중에 새로운 장소를 한 군데라도 더 가보고 싶어 하는 성향 탓에 그랬다. 그러다 1박만 머무는 호캉스를 자주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조식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호텔 조식도 매우 중요한 경험 중 하나니까. 같은 이유로 룸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뭔가 사설이 길었는데, 일찍 일어난 덕분에 짐 정리도 다 마친 후에 느긋하게 조식을 먹으러 나섰다. 포도호텔의 시그니처인 조식 메뉴를 시켰다. 작년 종달리에서 마셨던 당근주스도 그렇고 이번 포도호텔도 그렇고, 제주도에서 파는 당근 주스들은 색이 참 진하다. 어린이들 단어 공부할 때 볼 수 있는 그 당근색이다. 누가 봐도 '당근이었네'라고 알 수 있는 색. 찬들도 정갈하고 밥도 맛있고 든든하게 먹었는데 당근주스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제는 별생각 없었는데, 창가 쪽에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마치 나를 위해 맞춰놓은 것처럼 편하다. 테이블 높이도 딱 맞아떨어져 앉아서 노트북을 갖고 놀거나, 책을 읽기 참 좋다. 게다가 바로 옆에 탁 트인 창과 풍경이 있으니 더 좋다. 창에 앉아 잠시 책을 읽다 보니 제주도 날씨가 참 대중없다는 것도 알기 쉽다. 창 옆에 앉아 있다 보면 수 분 내에 분위기가 여러 번 바뀐다. 그때마다 음악을 바꾸며 장단을 맞춰 본다. 편안한 의자와 시각과 청각의 조화가 어우러져 풍성한 시간이 된다.
비가 미스트처럼 흩뿌려지다 햇빛이 잠깐 들자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무지개였다. 창가에 앉아 멍 때리고 있다 발견한 광경이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태양빛이 대기 중의 물방울에 굴절/반사되어 나타나는 자연현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아침이다. 로또라도 사야 하나?
고맙게도 친구가 비를 뚫고 픽업을 와준 덕분에 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왔다 갔다 하면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일부러 시간을 내 와주니 감사할 뿐이다.
점심 메뉴는 짜파구리. 요즘 점심때 면 먹을 복이 터졌나 보다. 짜파구리는 다 좋은데, 두 봉지 단위로 끓여야 하다 보니 양 조절이 쉽지 않다는 게 단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 개(짜파게티 2개, 너구리 매운맛 2개)를 끓였는데(내가 끓인 건 아니지만), 괜히 걱정했네. 셋이서 라면 네 개쯤이야.
러닝을 간 친구 커플로부터 SOS 신호를 받고 애월항으로 향했다. 바람이 진짜 무지막지하게 불더라. 해안가로 갈수록 바람이 더 강해지더니 태풍이라도 부는 것 같았다. 차에 태워서 무사히(?) 집으로 데려왔다.
비가 잦아진 틈을 타 오름에 올랐다. 어제부터 내린 비와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우중충하고 으스스했다. 분위기 탓인지 평소와 달리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기보다는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는 느낌으로 빠르게 돌다 보니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미끄러운 거 알고 조심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나마 다행히 안경이 계단 위에 떨어져서 바로 찾았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수풀 속에 떨어졌으면 안경 찾으러 기어 다닐 뻔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집에 오는 길에 점빵에 들러 막걸리를 하나 샀다. 날도 우중충하니 저녁에는 빈대떡이나 부쳐먹을 생각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버섯과 야채를 넣어 전을 부치고 만들어 둔 계란장을 양념장으로 먹으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두텁게 구워지긴 했지만 역시 비 오는 날엔 빈대떡이다.
포도호텔에 머무는 동안, 제주집에 머물던 친구가 김영하 작가님의 책, <여행의 이유>에 내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은 챕터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었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친구가 넌지시 책을 건넸고, 친구가 얘기한 그 챕터를 읽었다. 친구가 예상한 대로 한 챕터였을 뿐이지만 꽤 많은 문장에서 격하게 공감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여행을 떠났을 때 긴장이 풀리는 시점이 그랬다. 여행을 다닐 때면 언제나 호텔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잔뜩 긴장한 채로 목적지로 향한다. 여러 번 방문한 나라나 도시를 가더라도. 겁이 많아서 그런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참 움츠러든 채로 호텔에 체크인하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선 후 문이 닫히는 순간, 그 순간에서야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편해지는 편이다. 드디어 이 도시에, 이 나라에 도착했구나. 나도 이제 편하게 이 곳을 즐길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금세 움츠렸던 어깨를 펴곤 한다. 이런 걸 비슷한 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고작 한 챕터였지만, 그동안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경험과 감정들을 작가님이 내 대신 적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글 쓰는 사람들은 다르구나를 느꼈다. 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호텔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마다 답변에 녹여내기 좋은 글들이었다.
특히 아래 두 부분이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집에서 쉬면 되지, 왜 호텔에 가서 쉬려고 하냐고 물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Quoted from <여행의 이유> by 김영하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Quoted from <여행의 이유> by 김영하
길고 풍성한 하루였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온천수에 들어갔었던 게 오늘이란 게 믿기 힘들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