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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15. 2021

코비드-19 시대의 나들이 3종 세트

손 씻기에 대한 물건들



나는 처음부터 코비드-19가 3년쯤 갈 거라 생각했다. 100여년 전 세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이 3년쯤 갔기 때문이었다. 코비드-19 시대라 할 만한 일상에도 익숙해졌다. 필수품이 된 마스크도, 누군가 내 정보를 채가고 있는 듯한 QR 체크인도 어느 정도는 체념하듯 하게 됐다. 내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이 상황 속에서 정말 고통을 받을 걸 생각하면 조금 괴롭긴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 사이로 점점 절실해지는 게 있다. 손씻기 설비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코비드-19의 가장 중요한 예방은 손 소독이다. 손을 잘 씻고, 손으로 눈이나 입 등을 만지지 않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아 주기만 해도 코비드-19를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에는 아직 손씻기 설비가 미비한 곳이 많다. 물과 비누와 타올이 모두 있는 화장실을 찾기 쉽지 않다. 한 순간에 모든 화장실에 손씻기 설비가 마련될 리는 없다. 쓸데없이 화 내느니 방법을 찾는 게 훨씬 낫다. 이 참에 29cm에서 파는 손 씻기 관련 상품들을 찾아서 갖고 다니기로 했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손 씻을 사람이 손씻기 키트를 챙기는 법이다. 



처음 생각한 건 비누였다. 치약처럼 짜서 쓸 수 있는 핸드 워시를 찾다 보니 이런 게 나왔다. 원플러의 퍼스널 핸드 워시 투데이. 처음에 보고 좀 당황했다. 너무 멀쩡하게 생겨서. 보통 소형 브랜드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내세우려는 경우가 많은데(이해한다) 원플러 핸드 워시는 제품의 향과 패키지 디자인 모두 나서려는 부분이 없었다. 그게 굉장히 세련된 태도다. 이제 한국에 이런 브랜드까지 나오나 싶어 조금 놀랐다. 



손을 씻었으면 닦아야지. 공용 화장실은 손 닦는 설비가 없는 곳이 많아 은근히 무안하다. 매번 내 바지를 쥐락펴락하며 손의 물기를 닦기도 좀 그렇고, 바람 부는 핸드 드라이어는 요즘같은 세상에 써도 되나 싶어서 조금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핸드 드라이어가 시원하게 손의 물기를 다 말려주지 못하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핸드타올도 필요했다. 


핸드타올은 찾다가 허그플러스로 골랐다. 받아 보니 원사가 얇고 타올 원단의 고리 모양 짜임도 촘촘해 생각 이상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19cm x 38cm의 크기도 좋고. 호텔에 있는 정사각형 핸드 타올의 딱 반에 가까운 사이즈인데 들고 다닐 거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 핸드타올 역시 전반적으로 예상 외의 완성도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놀랐다. 대나무 섬유로 깨끗하게 만들어서 친환경적이고 좋다고 하는데, 그런 말 굳이 잘 몰라도 만져보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았으면 핸드 크림도 바르고 싶어진다. 요즘은 나이가 들다 보니 비누로 손을 씻으면 손의 기름기가 빠져나가며 피부가 아려 온다. 어릴 때는 손등이 터지거나 말거나 핸드 크림같은 것 안 바르고 잘 다녔는데 어느덧 그러고 다니기 머쓱한 중년이 되었다. 이제 핸드크림은 코비드 시대 중년의 립밤 비슷한 게 된 것 같다. 핸드크림 역시 선택지가 많았다. 국내/해외, 고가/저가, 대용량/소용량 등 다양한 핸드크림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하나도 망설이지 않고 아모레퍼시픽 일리윤 무향 핸드크림 소형을 골랐다. 


자체 기술과 연구진과 생산설비를 갖춘 아모레퍼시픽의 역량은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 아까 언급한 원플러 핸드워시를 비롯해 요즘 유행하는 예쁜 화장품은 거의 전부 한국콜마나 코스멕스의 ODM 생산품이다. 디자인이나 브랜딩을 브랜드사에서 하고, 생산은 ODM사에서 진행한다. ODM 자체는 불법도 편법도 아닌 현대 사업 모델의 일부다. 앞으로 이런 식의 생산 ODM화는 제조 전 영역에서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다만 내가 그저 자체 생산 설비와 자체 기술을 갖춘 곳을 더 좋아한다. 심지어 아모레퍼시픽은 연구소 건축가까지 알바로 시자를 모셔 왔다. 연구 개발 시설 건축에 세계적 건축가를 모시는 건 스위스의 최상급 시계 브랜드만 겨우 하는 일이다. 


일리윤이라는 브랜드 역시 아모레퍼시픽의 지금을 잘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아모레퍼시픽의 헤라나 설화수 등은 뭐랄까, 나처럼 평범한 남자가 쓰기엔 좀 장엄한 느낌이 있었다. 오페라 틀어놓고 삼각김밥 먹는 느낌이랄까. 일리윤 정도면 딱 적당하다. 무향이라 핸드워시와 향이 부딪힐 일도 없고, 얇게 발리는 동시에 손 피부에 스며들 듯 감싸주는 역설적인 감촉도 좋다. 예쁜 화장품의 ODM 핸드크림도 많이 써 봤는데, 확실히 자체기술을 가진 회사들은 품질의 디테일이 좀 다르다. 불필요하게 고급스러운 티도, 애처로운 싼 티도 안 나는 패키지 디자인도 충분하다.



핸드워시에 타올에 핸드크림까지 찾다 보니 이것들을 다 담을 파우치도 필요해졌다. 좋은 파우치에 대한 기준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산과 색 등 기본적인 요소들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5천원짜리부터 10만원짜리까지에 이르는 파우치들 사이에서 계속 다음 페이지를 누른 끝에 페리고의 휴대용 파우치를 골랐다. 


페리고는 이 파우치 때문에 나도 처음 알았다. 프랑스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라고 한다. 프랑스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도 딱히 내 기호에 맞지는 않으나 이 파우치를 들여다보면 역시 프랑스는 선진국이구나 할 만한 저력이 느껴진다. 제품의 전반적인 비례가 깔끔하고 쫀쫀한 나일론을 써서 더 이상의 디자인 디테일이 필요 없다. 페리고 로고 위에 ‘럭셔리 트레킹’이라고 적어둔 건 조금 무안하지만 그것도 프렌치 시크의 일부겠지. 나는 그냥 트레킹이 더 좋긴 하다.



생각한 내용물이 하나 더 있다. 손 소독제. 놀러 다니다 보면 아예 수도가 없는 곳에 갈 수도 있고, 이렇게 다 챙겨 나가면 으레 '야 너만 살겠다고 좋은 거 다 갖고 다니냐'고 이죽거리는 사람이 한 명씩은 있게 마련이다. 멍청한 소리에 인자하게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멋일 테니 그럴 때 미소를 지으며 건네기 위해 손 소독제를 하나 더 챙긴다. 손 소독제 역시 아주 많은 종류의 물건이 나와 있는데 내용물은 거의 비슷하다. 나는 가장 생김새가 간단하게 생긴 에티카의 손 소독제를 골랐다.




파우치를 넣을 가방도 있어야겠지.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부담 없을 것 같은 생김새에 원단과 손잡이가 튼튼한 가방을 찾고 싶었다. 그 기준으로 마지 언타이틀의 그로서리 토트 백을 골랐다. 이렇게 기본적인 가방은 미국과 일본과 유럽과 한국의 미감과 비례 차이를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내 느낌엔 손잡이와 어깨끈이 조금 얇지만 제조의 세계는 심오한 것이다. 생산자의 의도나 사정이 있었겠지. 



집에서 챙겨 나가야 할 짐이 하나 더 있다면 블루투스 스피커다. 요즘 세상에 나머지는 웬만하면 가다가 사면 되니까. 소니의 블루투스 스피커는 아주 쓸모 있다. 소니가 최고의 블루투스 스피커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부터 소니 말고 다른 건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게 되었다. 소니 블루투스 스피커는 보스나 뱅앤올룹슨 등 고가 오디오 브랜드의 블루투스 스피커보다보다 저렴하다. 가격대로 승부하는 중소기업 제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제품의 완성도가 높다. 디자인, 만듦새, 음질, 방수 성능, 인터페이스의 매끈함 등에서 글로벌 기업은 역시 다르다. 예전의 소니가 기술의 소니였다면 지금의 소니는 최적화의 소니같은 기분이다. 


나갈 준비가 다 됐다. 가방 안에 파우치 하나 스피커 하나 넣고 길을 나선다. 어차피 코비드가 한창일 때니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다. 날씨 좋을 때 걷다 보면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호젓한 곳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곳에서 편의점 김밥 아니면 과자라도 먹으면서 책 보거나 음악 듣다가 돌아오면 요즘 세상의 나들이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때라도 손은 씻어야 하니, 꼭 이 구성이 아니어도 자신만의 손씻기 키트 하나쯤 구비하는 건 어떨까. 나만의 손씻기 세트 꾸리기야말로 이 시대의 쇼핑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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