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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기린 Jul 26. 2017

삼겹살이 팔자인 '옥자'

감독 봉준호, 폴 다노, 틸다 스윈튼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옥자>

옥자 귀엽........

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살, 등심, 삼겹살, 사태, 알겄어? 이번에 가면 이렇게 되는 거여. 이게 이놈이 타고난 팔자여." 

옥자의 팔자는 '삼겹살이 되는 것'이다. 공장으로 억지로 들어가 일단 총에 맞아 죽고, 몸이 잘게 쪼개져 분해된 뒤 '버릴 곳이 없어' 부위별로 팔린다. 게다가 인간의 입장에서 옥자는 'taste f*cking good'이다. 영화는 옥자의 (인간이 정해놓은) 기구한 팔자, 그리고 옥자의 팔자를 거부하고 그를 구출하려는 용감한 소녀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스토리다. ALF는 미란다그룹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데 성공하고, 미자는 옥자를 구해 강원도 본가로 돌아간다. 결말도 해피엔딩이다. 얼핏 보면.


영화에서 미자는 낸시에게 금돼지와 옥자를 교환할 것을 제안한다. 쉽게 말해 미자는 옥자를 돈 주고 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미자는 세상의 규칙을 일찍 알아버린 걸까. 미자가 옥자를 살리는 건 성공했지만 공장 부지에 남은 슈퍼돼지들은 사육장으로 끌려간다. 옥자를 살리고, 어린 슈퍼돼지 한 마리를 구하는 게 봉준호가 그린 해피엔딩이다. 파멸하는 악당(루시와 미란다그룹의 이미지 타격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소비자들이 미란다그룹의 음식을 구매할 걸 안다)도 없고, 모든 슈퍼돼지를 구하는 영웅도 없다. 대신 세상 어딘가에 있을법한 미자가 있다.



피터 싱어는 책 '동물해방'을 통해서 사육장의 시스템을 폭로했다. 또한 책은 세상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면 동물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절대로 동물권이 인권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말한다. 한동안 책을 읽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동물권은 이제야 현대인이 관심 가지게 된 분야다. 그것도 인간 친화적인 동물(반려동물) 순서로 권리가 보장받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강아지 공장이 폭로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해전. 영화 옥자에서도 미자와 10년 동안 교감한 옥자만이 구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인간의 가족인 옥자의 아픔에 감정이입을 한다. 영화는 그래도 관객에게 훈계질을 하진 않는다. 채식을 권유하지도 않고, 육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장면도 없다.


동물보호단체 'ALF'의 모습을 보자. 영화를 이들과 미란다그룹을 선악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냥 케이 입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 동물 애호가야'라고 말할 뿐이다. ALF는 미란다그룹의 실체를 폭로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축산품 생산을 위해 태어나 감금상태로 사육당하는 모든 동물의 해방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옥자를 실험실에 넣어 최악의 경험에 빠뜨린다. ALF의 수장인 제이는 미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자비로운 면을 보이지만, ALF의 신념을 배반하고 통역을 일부로 잘못한 케이를 구타한다. 세상의 모든 옥자들의 기구한 팔자를 없애기 위해 ALF는 때로는 모순적인 일을 저지른다. 일정 수준에서 타협하는 일.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부수적인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 ALF는 완벽한 선이라기보다는 불합리한 구조에 저항하는 세력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영화 '옥자'는 동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현실을 그렸다. 현실에서 한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화 한 편 만들어진다고 바뀌지도 않을 현실을 왜 관객이 봐야 하는 걸까. 이야기가 재미있고 옥자가 귀여워서? 영화는 '인지'를 노린다. 옥자의 디스토피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유사할 수 있다는 깨달음. 사실 그 깨달음이 가장 하찮아 보이지만 대단하다. 그렇게 영화 '옥자'는 관객들의 세계관을 부담스럽지 않게 넓히고 있다.


ㅁ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지만 결국 넷플릭스로 봐서 좀 아쉽다. 내리기 전에 꼭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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