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한국
한국에 오면 언제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편의점에서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비요뜨를 사는 일이다. 티비를 켜고 밀린 세탁을 하고 침대에 누워 비요뜨로 시작하는 아침. 조금 걷고 싶어서 텀블러에 아이스커피를 담고 가볍게 읽기 좋은 책 한 권 챙겨서 오랜만에 광주천 산책에 나섰다. 임동 야구 경기장 옆을 따라 쭉 걸어가는 길. 연둣빛이 눈부신 여름을 맞이한 이곳엔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 타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명상하는 사람들, 암벽 등반이라도 할 기세로 등산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트로트 리듬에 맞춰 좌우로 몸을 흔들며 흥겹게 운동하는 어르신들로 가득했다. 보는 사람까지 신났던 활기찬 광주 아침! 그래, 이런 게 한국의 매력이지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 씻고 선크림만 바르고 편안한 옷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 근처 베이커리 카페 갤러리 24에 갔다. 카페 직원과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아인슈페너를 시키고 좋아하는 책장 옆 널찍한 소파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이라 한적한 카페에서 북클럽에서 이야기 나누기로 한 책 동물농장을 읽다가 노트북으로 일기를 쓰다가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 했다. 도쿄에서도 일을 하러 가기 전 아침마다 같은 카페에서 같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출근하는 일이 많았는데 여행 와서도 나는 틈만 나면 갤러리 24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도쿄에서의 일상과 별 다를 거 없이 한국에서도 걷고, 카페를 가고, 책을 보고, 외식을 하고, 사진을 찍고, 일기를 썼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을 잘 알게 되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파악하고 그렇게 그린 지도대로 위험한 곳은 피하고 좋은 곳에는 자진해서 오래 머무르는 것. - 익숙한 새벽 세시
나는 도쿄에 사는 한국 사람이지만 올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내 나라를,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도시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한국에 오면 되도록 오래 머무르는 편이다. 그동안 부산, 서울, 제주, 양양, 대구, 경주, 순천, 전주, 여수 등 다른 도시를 여행하기 바빴는데 이번 여행은 서두르지 않고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고 조용히 관찰하기로 했다. 임동, 충장로, 동명동, 양림동, 상무지구, 첨단 등 익숙한 광주 거리를 걸으며 나는 자주 과거 속으로 떠밀려갔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즐겨 찾던 도청 앞 롯데리아는 아직 그대로네. 그때 친구랑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 친구는 꿈을 이루었을까? 생각하기도 하다가 저기 분식집에서 친구들이랑 교복 입고 더운 선풍기 바람맞으며 상추 튀김과 떡볶이를 자주 사 먹곤 했었는데 어쩐지 그곳만 시간이 멈춘 거 같다고 느끼며 골목골목 과거를 거슬러 확인하며 현재를 지나갔다. 그새 바뀐 간판과 임대라고 쓰여 있는 텅 빈 건물들을 지나며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살피다 새삼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일 년에 한 번 가족을 만나기 위해,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와, 골목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반가운 얼굴들과 추억들을 만나기 위해 내 고향 광주를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