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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Nov 28. 2020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1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을 접하기 전, 누군가에게 '글은 알랭 드 보통 같은 사람이 쓰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글을 한 사람의 지식과 사유와 문체의 복합적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때, 독자로부터 그러한 평을 받을 수 있는 작가라면 꽤나 재기 넘치는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스물셋의 나이에 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사랑 3부작의 첫 작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집필한 걸 보면 필경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으며 상기의 호평을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언젠가 느꼈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캐치하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철학과 인문학의 개념을 차용해 위트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처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사랑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해 필사적으로 탐구하는 묘미는 없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처럼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을 묘사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윤택했으나 성장기에 부모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했으며/ 직장에서 얼마간의 인정을 받으며 나름의 워라벨을 추구하고/ 사랑이 언젠가는 삶의 허무를 메워주리라는 낭만주의적 기질을 가진 주인공 '앨리스'의 연애사다. 앨리스의 연애 역시,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이고 이별은 언제나 현실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당신의 연애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지적 허영과 설렘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하겠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를 관람할 때 ‘나만 이런 감정을 겪으며 이 거리를 보고 카페에 앉아 있는 게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삶에 대한 고독감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다. 주인공 앨리스는 연인으로부터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경험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앨리스는 어떠한 감정이나 사건을 겪었을 때 ‘당신도 느끼나요? 정말 근사하죠'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알랭 드 보통은 앨리스의 그러한 욕망이야말로 '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미묘하게 닮아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의 실체'라고 설명한다. 

 앨리스의 욕망(타자에게 강렬하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은 비단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에서만 발견되는 특성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관점에 따라 비이성적,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점성술과 같이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방법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가 있는 것은 그 근저에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이성적, 과학적 사고보다 월등히 선회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연을 만들어나가고자 할 때(그러기를 소망할 때) 혹은, 미지의 환경에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할 때 우리가 최초에 취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는 상호 간에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포커를 플레이하듯 상대방의 손에 쥐어진 패가 무엇인지 어림짐작하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을 경험했는지' 등의 패를 신중하게 내보인다. 


 그와 같은 정보 교환 게임은 'High lisk, High return'의 원리를 차용하기에 더 큰 위험(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을 감수할수록, 더 큰 보상(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의 확장)이 뒤따른다. 그러니까 이 게임의 핵심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교집합의 파이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지의 여부에 있다. 그렇다면 공통점을 지난하게 발견하는 것, 그럼으로써 교집합을 확장하는 것은 관계에서 왜 중요한가.


 그전에 이 질문부터 해소해보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이는 사기꾼 혹은 이상주의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어떠한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감정은 오로지 자신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 감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사고방식, 처한 상황, 정서적 기질을 투과함으로써 완성되는 유일무이한 심리적 여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과된 상대방의 감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확률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완전히 0%라고 확정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상 0%에 가까운 그런 확률. 그러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원한다. 그와 같은 욕구는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이성적, 과학적 사고를 월등히 선회한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혼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의 교집합을 발견하고 용기를 내 기꺼이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과 내가 비슷한 사건들을 경험했다는 것, 비슷한 감정들을 겪었다는 것은 이해의 가능성(사실상 '근접의 지평')을 높여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0에 수렴하는 확률 속에서 100%의 확신을 바라는 우리의 사랑은 어리석은 짓일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속, '기우'의 대사를 인용해본다. '아버지 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확신을 안고 사랑에 빠지는 이들의 노력은 비견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하고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로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용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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