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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Nov 30. 2020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2부: 이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니까 

이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니까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은 ‘영상의 지속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익숙하면서도 자뭇 흥미로운 논리를 펼친다. 영상의 지속성은 '대상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대상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상에 대한 이미지(신뢰, 복귀에 대한 확신)가 계속해서 지속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영상의 지속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달하는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유아기에 어머니가 출장이나 여행을 떠났을 때, 항상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돌아오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한 성인은 어머니의 대체물인 친구, 애인 역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영상의 지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유아기에 반대의 경험 '너무 늦은 귀한', '이별'을 경험한 성인은 대체물들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상대방이 언젠가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갖는다.  

 알랭 드 보통은 이 개념을 차용해 ‘사랑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사랑의 연속성은 상대가 당장 관심의 징표나 신호를 보내지 않더라도 이는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자신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랑의 연속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인의 일시적 부재 혹은 소원함에도 태연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집착 혹은 편집증적인 강박 증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지는 사랑에 대한 확신은 '학습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반사작용'이라는 사실이다. 학습과 경험의 원초적 동기는 '보상'과 '상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기를 복기해보면) 보상을 통해 무언가를 행해야 함을 학습하게 되고, 상처를 통해 무언가를 행하지 않아야 함을 학습하게 된다. 위니캇이 말했던 유아기에 애착을 가진 존재가 귀환하지 않은 경험은 일종의 상처로 남게된다. 그리고 상처에는 항상 고통이 뒤따른다.

 

 신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통은 불편하지만 아주 강렬한 생존본능이다. 피가 흐르거나 살이 찢어졌을 때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태여 환부를 치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심한 경우 종래에는 환부를 도려내야 하거나 합병증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처에 적합한 고통을 느낌으로써 신체가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를 할 수 있게 되고,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이 겪는 고통의 매카니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감당하기 어려운 이별을 겪었다면,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됐다면 우리의 뇌는 감정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고통을 자각하게 해 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 깨닫게 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을 것이라는 소망, 그리고 열망하는 누군가와 언젠가는 함께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물론, 위니캇과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영속성' 혹은, '연속성'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천편일률적인 법칙은 아니다. 사람이 수치값(경험)에 따라 결과값이 곧이곧대로 산출되는 존재였다면 <우리는 사랑일까>와 같은 자유분방한 지적 생산물은 존재할 까닭도,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정지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소중한 사람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단절은 분명 어떻게든 상흔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로마 시대 장군들이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 개선문을 지나갈 때마다 노예를 시켜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게 했던 것처럼 이별에 대한 상흔은 주체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다시 사랑으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할 것이다. 일종의 'Memento Amor(사랑을 기억하라)'인 셈인데 그 사실에 겁을 먹는 것을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계란 언제나 쌍방의 문제이고 나의 최선이 곧, 그 사람의 최선을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회한에도 사랑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더 이상 비겁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사랑에는 상처가 수반된다. 이해의 매커니즘과 동일한 맥락에서 상처 없는 사랑에 대한 가능성도 0에 수렴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한다는 건 상처를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의 내용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온다는 점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며 여지껏의 논지를 덧붙이면 '나의' 과거의 상처와 지금의 상처와 미래의 상처 역시 함께 온다는 점에서도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상처로 인해 사랑하지 말기를 종용받으면서도 구태여 또 다시 상처 받을 각오로 사랑을 시작하는 이유는 사랑이야말로 무엇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3부에서 이야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소중한 시간 내어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어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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