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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Dec 31. 2020

사회적 소수자들이 끝끝내
완성시킨 드림랜드

라이언 머피와 이언 브레넌 감독의 넷플릭스 신작 <오, 할리우드>

1. 잊고 지내왔던 열정을 복기하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상기하게 하는 작품이 있다. <글리>와 <더 폴리티션>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라이언 머피, 이언 브레넌 감독의 <오, 할리우드>가 그랬다. 두 감독은 <글리>에서 보여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인간적 시선과 <더 폴리티션>에서 보여준 반전의 묘미를 그대로 차용해 194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역사를 재현한다. 그리고 모든 서사적 조명을 동원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어온 차별과 저항의 역사'를 강렬하게 비춘다. 조명은 꺼졌지만 그 온기는 아직까지 유효하기에 그 온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2.  <오, 할리우드>는 영화산업에서 유색인과 여성에게 허락된 영역이 희화화, 대상화된 조연에 불과하던 시대(1940년대 미국)에 영화라는 열정 하나만으로 할리우드에 상경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흑인 동성애자 극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아치)/ 아시아계 신인 감독이 연출하고(에인슬리)/ 흑인 여성 배우(카밀)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멕>이라는 작품이 영화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담아낸다. 이 이야기가 귀한 까닭은 영화가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상영되기까지의 절차적 험난함을 초월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의 차별에 대한 투쟁을 따듯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는 라이언 머피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실존 인물과 사건에 그 서사적 빚을 지고 있다. 극 중 아치의 애인으로 등장했던 '록 허드슨'은 1950년에 스타덤에 오르며 제임스 딘과 당대를 호가했던 유명배우로 실제 동성애자였으며 말년에 동성애와 에이즈 투병 사실을 공개했고/ 여주인공 카밀의 조언자 내지 조력자로 얼굴을 비춘 배우이자 편집자 해티 맥대니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1)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상(여우조연상)을 수상하지만 드라마에서 재현됐듯 흑인이라는 이유로 시상식에 입장하지 못했고/ 할리우드 최초의 동양인 배우 안나 메이 윙은 동양인에 대한 희화화, 정형화된 편견을 바꾸기 위해 싸워왔다.    

 극작가 아치가 집필한 <멕>의 모티브가 무명배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할리우드 랜드 사인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실존인물 '펙 엔트위슬'이라는 설정 역시도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녀가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까닭은 직업적 실패에 따른 자조와 불안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로 인해 자신이 아주 오랜 시간(어쩌면 그녀의 배우생활이 끝날 때까지)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막연한 공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 할리우드>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모두가 펙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공유한다. 드림랜드의 표상물인 할리우드 랜드 사인의 조명은 휘황찬란했지만 출신, 성별, 인종, 성적 지향을 모두 끌어안을만큼 따듯하진 못했다. 

 물론, 메인 플롯인 극 중 <멕>이 영화화되는 과정 자체는 픽션이다. 그러나 제작사에서 극작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대본에서 다른 명의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씬, 흑인 여성이 주연이라는 이유로 전국적인 항의와 극장의 상영 거부가 이어지는 씬 등은 그 시대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자행되고도 남았을(실제로 자행되기도 했던) 상황이기에 상기의 실화들과 맞물리며 일종의 다큐처럼 와닿는다. 이와 같은 실화와 실화성을 기반으로 서사를 구축한 <오, 할리우드>는 유색인, 성소수자, 여성이 영화시장에 주연의 영역으로 편입하게 된 일련의 과정이 장대하고 지난한 투쟁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투쟁이, 비단 한 사람의 투쟁이 아닐 때가 있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3.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는 당시대의 사회·문화를 반영하는 사회문화적 특성과 투자와 수익으로 귀결되는 산업적 특성을 동시에 갖는다. 그리고 '큰 이변이 없다면 하부구조(경제)가 상부구조(사회, 정치, 문화)를 지배한다'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단단하게 전제돼있다. <오, 할리우드>에서 <멕>의 시나리오가 불발 위기에 처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주도하는(=재화에 대한 지불 능력이 있는) 기득권이 '백인', '남성', '이성애'를 신봉하기에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을 반영해 영화를 제작, 배급, 유통하는 것이 'Low Lisk High Return'이니 신념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고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멕>의 제작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그와 같은 경제논리를 표방한다. 그러나 노둥운동이 그랬고, 복지운동이 그랬듯 인권이 한 단계 진일보할 수 있었던 역사의 순간들에는 그러한 경제논리를 상회하는 '당위성'이 있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받는 것만큼이나 성별, 성적 취향, 인종에 대한 차별 없이 연기를 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보장받아야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상기의 경제논리가 다수의 저항으로 무너질 수 있었던 건 경제논리가 가진 논리적 빈약함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건 공고해 보이는 기득권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적 허용으로 <멕>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영화화와 흥행에 성공하고 아카데미에 다양한 부문이 노미네이트(수상 후보 선정)되는 쾌재까지 누린다. <멕>의 출연진과 제작진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다룬 마지막 에피소드는 <오, 할리우드>의 피날레로 그들이 겪은 차별과 보인 투쟁에 대해 라이언 머피와 이언 브레넌 감독이 보내는 온정어린 헌사다. 영화적 허용이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해 <멕>의 출연진과 제작진들이 주요 부문을 수상하고 주연배우 카밀이 대망의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을 거머쥐고 눈시울을 붉히는 일련의 씬들은 퍽 감동적이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파리의 한 작은 카페에서 최초의 영화가 상영된(1895년) 이레 서구사회에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군으로 분류되고 문화생활의 중심이 될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한 시점으로부터 아카데미에서 유색인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69년 뒤였고(<들백합>의 시드니 포이티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107년 뒤였다(<몬스터 볼>의 할리 베리). 라이언 머피와 이언 브레넌 감독은 영화적 허용을 통해 여우주연상 수상을 반 세기나 앞당긴 셈인데 그러한 일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해도 해티 맥대니얼이 여우조연상 수상 이후에도 정형화된 흑인 배역만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당장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화는 아주 사소하지만 확실하게 진행된다. 공주가 저주로부터 왕국을 구하고 흑인 여성 히어로가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자란 지금 세대의 아이들이 꿈 꿀 수 있는 미래는 이전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배제돼왔던 이들이 주연상을 받고, 감독상을 받는 건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경험한 세상과 그 이전의 세상 역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건 수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그러한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멕>의 감독 에인슬리가 제작사 실무자에게 말하듯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영화의 영향력을 간과하고는 한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4. <오, 할리우드>는 영화인들의 이야기다. 배우뿐만 아니라 극작가부터 시작해 에이전트까지. 이들에게는 각자만의 이유로 영화를 간절히 소망한다. 영화 관련 면접을 볼 때면 으레 듣게 질문 중 하나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다. 그럴 때면 삶이 미운데 방황은 사치라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때 본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에 위로를 받은 경험을 말하곤 했다. 극 중 인물들 역시 '유명해지기 위해',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라는 세상에 압도돼서' 등의 이유로 영화를 소원하는데 그 하나하나의 열정이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마냥 뜨겁진 않지만 적당한 온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지핀다.

 몇 가지 아쉬운 지점도 존재한다.라이언 머피와 이언 브레넌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위장 주유소를 개업해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남성 매춘을 제공한 실존인물 '스코티 바워스(극중 이름 '어니')' 역시 차용해 이야기의 주된 플롯에 투입시킨다. <멕>을 집필한 극작가 아치와 <멕>의 남주인공 잭 역시, 무명시절 어니의 주유소에서 일하며 경제 생활을 영위했고 관계를 맺으며 형성한 연으로 영화계에서 일말의 도움을 받는다. 경제적 악조건으로 인해 어니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부정한 청탁 등의 사회적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어니는 미화되고 문제의식은 흐려지다 못해 증발한다. 

  두 감독이 차용한 또 다른 실존인물 '헨리 윌슨'을 다루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소속 배우들을 제작사에 연결시키는 에이전시로 등장하는 헨리 윌슨은 영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악용해 남성 배우들에게 자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강요한 악랄한 인물이다. 헨리 윌슨과 록 허드슨은 실제로 에이전트-소속배우 관계 였으며 극 중 헨리 윌슨이 록 허드슨에게 요구한 부당한 지시들의 일부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리 윌슨 역시 결말 부분에 있어서는 회개하고 개과천선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록 허드슨에게 눈물의 참회를 했다가 거절당하지만 그러한 묘사를 통해 절반짜리 면죄부를 받는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5. 개인적으로 라이언 머피와 이언 브레넌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글리>의 굉장한 팬이다. 내고등학교 2, 3학년 시기를 복기해보면 <글리>의 주인공들과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사회적 소수자들로 구성된 고등학교 합창단원들의 음악과 이야기가 그때의 나에게는 퍽 따듯하게 느껴졌나보다. <오, 할리우드>는 <글리>의 그러한 정서와 향수를 그대로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글리> 이상은 아니었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과 이야기는 사려깊었지만 서사 전개의 평이함과 문제의식의 결과적 용두사미는 진중함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지점이지만 이와 같은 콘텐츠와 주제가 점차 통용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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