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크가 고양이를 키울 때 듣게 되는 말들
둘 아닌 셋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내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둘이 아닌 셋으로 시작됐다. 남편, 나, 그리고 남편의 고양이인 반냐. 거기에 신혼 초 내가 길고양이인 애월이를 데려와 입양하면서 우리 가족은 사람 둘, 고양이 둘, 도합 넷이 되었다.
그렇게 9년째, 우리는 '2인 2묘' 체제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아이는 낳지 않았다. 앞으로도 낳지 않을 생각이다. 남편과 나 둘 다 결혼 전부터 아이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 할수록 비출산 부부로 살고 싶은 마음이 한층 더 확고해졌다. 우리는 긴 시간 상의한 끝에 딩크(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로 살기로 결정했다.
벌써 결혼 9년차이다 보니 지금은 양가의 어른들도 마음을 많이 내려놓으셨지만, 이건 순전히 시간의 힘이다. 결혼 생활 초반, 양가의 어머니들은 '말만 저러고 아이는 낳겠지' 하는 기대들을 하셨다. 특히 우리 부부가 출산과 비출산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나는 가끔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건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아닌 친정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고양이를 유난히 좋아하지 않았다.
고양이 때문이 아닌데요
엄마는 신혼 초, 우리 부부가 남편이 자취할 때부터 키우던 반냐와 함께 셋이 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부터 고양이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이에 뜻이 없는 딸과 사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얘들이 고양이만 키우다 아이는 영영 낳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와 둘이 있을 때면 "고양이는 요물이다", "고양이 눈은 무섭다", "고양이는 은혜를 모른다더라"라는 말들로 은근히 고양이를 싫어하는 기색을 비쳤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건 우리 부부지 엄마가 아니니까.
하지만 결혼하고 6개월, 1년이 흐르니 엄마의 입에서 아슬아슬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통화를 하다 엄마가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너 고양이 때문에 임신 안 되는 거 아니냐?" 나는 아연실색해서 고양이와 난임은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라고, 심지어 우리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결정하지 않았고 임신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당시는 우리 부부가 비출산을 확고하게 결심하기 전이었다). 엄마는 미심쩍은지 "그래도..."라며 말끝을 흐렸다.
엄마의 이 말 이후로 나 역시 고양이와 관련된 말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됐다. 하루는 남편과 친정 엄마 셋이서 외식을 했다. 남편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엄마가 내게 말했다.
"너, 임신하면 고양이 딴 데 보내."
엄마의 이 말을 기점으로 팽팽하던 신경 줄이 탁 하고 끊어졌다. 나는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왜 자꾸 우리가 키우는 고양이를 가지고 그러냐고. 엄마가 한 이 말 사위 앞에서도 할 수 있냐고.
여간해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딸이 빠르게 말을 쏟아내자 엄마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런 엄마의 표정을 보자 또 마음이 쓰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톤을 낮춰 말했다.
"엄마, 제발 그런 얘기 다신 하지 마. 고양이가 무슨 물건이야? 오빠가 자취할 때부터 함께 살던 가족이라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대차게 싸우거나 무시해버리고 말 텐데 하필 엄마가 이러니 답답해도 도리가 없었다. 화를 꾹꾹 누르며 답을 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 이날 이후 엄마는 우리가 고양이를 절대 어디론가 보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 '딴 데 어디 줘버리라'는 말만큼은 하지 않게 됐다.
남편과 나는 단순히 고양이 때문에 비출산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고양이가 있어도, 없어도 우리 생활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한 만큼 혼자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다. 우리는 생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 결혼을 택했고, 아이 없이도 끈끈한 결속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로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게 된 것뿐이다. 만약 지금 고양이들이 사라진다 해도 남편과 나는 출산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이 모든 일이 오로지 고양이 때문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모녀의 정서적 줄다리기... 그러거나 말거나 평화로운 고양이들
이후로도 어쩌다 엄마가 고양이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설명을 해야 했다. 고양이 때문에 비출산을 택한 것이 아니라 더 행복한 삶을 위해 결심한 것이라고. 엄마도 딸이 행복한 편이 좋지 않냐고.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남편의 생각도 확고하다고. 우리 두 사람 생각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고.
결혼 9년 차, 횟수는 줄었지만 아직도 가끔 엄마와 고양이를 두고 정서적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뜬금없이 고양이 수명을 묻고서는 우리 고양이들의 남은 수명을 계산하는 것 같을 때, 어디선가 들은 '고양이는 귀신을 본다더라' 하는 말을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나는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분이 된다. 그래도 이제 '갖다 버리라'던가 '시골로 보내라'는 소리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식탁에서 글을 쓰다 잠시 고양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려본다. 반냐는 책장 앞에서 낮잠을 자고 있고 애월이는 노트북에 호시탐탐 오를 기회를 엿보며 골골송을 들려주고 있다(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 골골 소리를 낸다). 비록 엄마에게는 비출산의 원흉이자 모든 문제의 시발점으로 낙인찍힌 두 녀석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얘들은 오늘도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