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만든 공간, 공간이 만든 머무름_ 해방촌 신흥시장
신흥시장이 위치한 해방촌은 그 이름처럼, 1945년 해방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민들 또는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 6.25전쟁으로 인한 피란민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동네다. 해방촌은 서울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고지대 서민 주거지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50년대, 귀환민들의 생활을 위한 생필품 공급처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신흥시장이다. 생선, 채소, 고기 등을 다루던 시장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주민들 사이의 소통과 일상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해방촌은 인구 구조가 더욱 복잡해졌고, 시장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이곳에는 여러 지방, 여러 출신, 다양한 음식문화가 뒤섞였고,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며 신흥시장만의 색을 만들어갔다.
해방촌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느닷없이 등장하는 신흥시장은, 여느 평지 시장과는 구조부터 다르다. 이곳은 지형을 그대로 따라 올라간 자연발생적 건축물들 사이에 형성된 입체적인 구조의 시장이다.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이 경사를 따라 어긋난 채 놓여 있고, 시장 외부에서는 1층으로 보이는 과일가게 아래 지하 1층이나 2층 공간이 시장 내부에서는 1층처럼 인식된다.
이 복잡한 높이 차는 오히려 사람들을 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길은 자연스럽게 휴먼스케일의 통로가 되고, 그 골목은 단순한 동선이 아닌 사람과 가게가 마주치는 접점이 된다. 특히 이 골목은 시장 내부 가게들에게는 외부이면서도 내부처럼 작동하는 이중적인 공간이다. 지붕이 없고 바람이 스치는 공간이지만, 주변 건축 구조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장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며 작은 테라스처럼 공간이 확장된다.
도시재생사업 이후, 신흥시장에 덮여 있던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되고 ETFE 필름이라는 반투명 신소재가 적용되면서, 내부에는 자연광이 스며들고 상부는 루프탑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졌다. 루프탑에서는 서울타워가 한눈에 들어오며, 이 시장을 서울의 풍경을 체험하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이 시장은 공간뿐 아니라 분위기마저 해방촌을 닮아 있다. 시장 내부에는 프렌치 디저트 카페, 프렌치 비스트로바, 아메리칸 차이니즈, 태국 정통 요리, 한방통닭, 멕시칸 타코 등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들이 향신료 향기와 이국적인 색감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신흥시장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감각의 통로가 된 셈이다.
몇년 전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려운 시기였지만, 외국에 가지 않아도 다양한 세계 음식을 현지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게 해방촌과 신흥시장의 매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팬데믹 기간 동안에도 해방촌과 신흥시장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위기의 시기에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았고, 시장은 음식과 공간, 그리고 다문화적 분위기로 도시에 작지만 확고한 회복력을 선보였다.
해방촌과 신흥시장을 채우고 있는 가게들은 각자 세계 여러 나라의 로컬을 해방촌이라는 로컬에서 선보이고 있다.
“시장은 흐름에서 머무름으로 변화하고 있다.” 도시건축가 박혜리는 그렇게 말했다. 본래 시장은 사람들이 빠르게 모이고, 물건을 사고, 다시 흘러가는 장소였다. 생필품을 값싸게 구입하기 위해 바쁘게 오가고, 오래 머물지는 않는 공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시장은 다르다. 사람들을 머물게 하려는 의도가 공간에 담기기 시작했다. 단지 물건을 사는 공간이 아니라, 잠시 앉아 쉬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머무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예전처럼 가게 안쪽에 숨겨진 테이블이나 밀폐된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서 훤히 보이는 열린 공간, 즉 오픈스페이스를 선호한다. 서로가 보이고, 공간의 동선과 시선이 겹치며,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곳.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단지 소비자가 아니라, 시장이라는 도시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머무름은 결국 공공성과 연결되고, 시장에 도시적인 품격과 깊이를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신흥시장의 공간 변화는 건축 구조만의 변화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카페 '오랑오랑'이 있었다. 이 카페는 시장 내부의 오래된 건물을 1층부터 3층 루프탑까지 직접 리모델링하며, 경사진 계단 구조에도 불구하고 커피의 품질과 건물이 지닌 빈티지한 감성을 그대로 살려냈다. 공간의 본질과 미감을 모두 충족시킨 이 사례는 시장 안에 머무는 경험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 흐름은 가수 정엽과 방송인 노홍철의 참여로 이어졌다. 그는 도시재생사업과 함께 신흥시장 내부의 또 다른 건물을 매입해,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리노베이션을 시도했다. 이 도전은 단순한 상업 목적을 넘어서, 시장 내부 건물 하나하나가 어떻게 도시 건축의 ‘작은 실험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주변 건물들도 하나둘 변화하기 시작했고, 신흥시장은 점진적으로 사람들이 머무는 시장으로 변모해갔다.
모종린 교수의 건축주도 지역발전론에 따르면 이런 '건물주 간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건축 디자인 경쟁'이 신흥시장 내 건축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진행 된 '클라우드' 프로젝트 아케이드 외에 도시재생 지원자금 저리 융자를 통해 건물 소유주는 해방촌 내 기존 건물을 구입 및 리노베이션 자금으로 투자 활용하여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을 만들어냈다.
시장은 단순히 유통이 이뤄지는 장소가 아니다. 이제는 ‘시간을 보내는 곳’, ‘사람과 연결되는 곳’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가게 몇 곳의 리뉴얼이나 트렌디한 상품 구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공간 자체가 사람을 머물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시장 건축은 ‘빨리 사고 떠나는 공간’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머무르는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열린 동선, 공유 테라스, 자연광, 루프탑, 가게와 골목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공간들. 이 모든 요소들이 머무름을 유도하는 시장의 미래형 건축어휘가 되어야 한다.
공간이 달라지면 시선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면 그 공간에 머무는 방식도 달라진다.
‘힙한 시장’이 살아남는 시대, 우리는 이제 시장이라는 장소를 다시 설계하는 시점에 와 있다.
참고문헌
박혜리, 끌리는 공간의 탄생! 해방촌 신흥시장이 새로 쓰는 해방일지, 서울시 정보소통광장https://opengov.seoul.go.kr/mediahub/28909939
도시지역의 형성 및 생태적과정에 관한 연구(이문웅,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6)
서울시 해방촌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도시재생(이나영 외, 한국도시지리학회지21, 한국도시지리학회, 2018),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권기봉, 알마, 2008)
월남인 마을 해방촌(용산2가동) 연구(이신철, 서울학연구14,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0)
모종린, 베를린 전통시장의 비밀,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1394
권예린, 건축학도의 렉크레이션, https://www.instagram.com/lectus.lecre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