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Dec 26. 2020

오늘 밤의 별들이 많이 그리울 거야


#_


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모처럼 가진 휴가의 첫날이었고, 밴쿠버에서 다섯 시간 거리의 시댁에 볼일이 생겨 집을 나선 날이기도 했다. 산을 가로지르는 코퀴할라 하이웨이는 그동안 우리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로드 트립을 떠났던 첫 해에는 엔진오일이 줄줄 흐르는 통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이듬해에는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큰 사고를 낼 뻔했다. 재작년에는 앞서 달리던 트럭이 자갈을 튕겨 자동차 전면 유리에 커다란 금을 새긴 아픔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 지점에 자리한 목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쉬엄쉬엄 달리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5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싸여있는 이 목장은 무슨 연유인지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여름이 절반은 지나서야 영업을 재개한 상태였다. 조금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그는 호숫가에서 즐길 수 있는 아침 승마도 예약했다며 꽤나 신이 나 있었다.


- 이쯤에서 출구가 보여야 하는데......

- 그러니까 진즉 내비게이션을 켰으면 좋았잖아.

- 내비게이션으로 나오는 위치가 아니라니까.

- 엇, 저기서 빠져야 하는 거 아니야?


엇, 그러네! 하는 말과 동시에 우리는 목장을 향한 출구를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다음 출구에서 돌아 나오자는 말이 무색하게 도로는 가지치기한 나무처럼 오직 앞을 향해 올곧게 뻗어 있었다. 5A를 따라 달리다 286에서 빠질 것. 갈림길이 나오면 호수가 보이는 방향으로 우회전할 것. 전화 예약 시 목장 주인이 알려준 길 찾기였다. 연세가 꽤 많은 듯한 할머니의 말씀을 그는 온순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종이에 옮겨 적었다. 구글 맵은 자꾸 엉뚱한 곳을 알려줘서 쓸모가 없어요. 어차피 하이웨이를 빠지면 휴대폰도 안 터진다니까. 할머니의 경고대로 휴대폰은 이미 no service라는 작은 글씨들을 띄운 상태였다. 삼십 분쯤 달렸을까. 기적처럼 나타난 다음 출구에서 방향을 틀어 지나온 길을 되짚어갔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구불구불 길을 따르다 보니 하이웨이에서 저 멀리 보이던 초원과 호수가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구글 맵도 알려줄 수 없는 숨겨진 공간. 드디어 찾았다.


- 아무도 없는데?


인적 없는 허허벌판엔 오래된 서부 스타일의 농가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Office라고 적힌 건물을 들어가 봤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둠 속에 얌전히 앉아있던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말굽쇠와 카우보이 모자, 커다란 곰 가죽으로 장식된 넓은 실내. 박제된 곰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처럼 또렷해 소매 아래로 거센 닭살이 일었다. 목장 안의 다른 농가들 역시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집으로 보이는 건물에선 유리창 너머 우리를 쳐다보는 두 마리의 보더콜리만 눈에 띄었다. 제아무리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라지만 세간살이가 다 드러나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고, 대체 주인은 어딜 간 것일까.


- 체크인이 몇 시야?

- 모르겠어. 그냥 저녁 식사 후에 오라고 했거든.


여섯 시도 일곱 시도 아니면 여덟 시인가? 이렇게 애매한 체크인 시간이 어딨담. 별도리가 없었던 우리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만치 넓은 목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 때는 단체 손님으로 붐볐을 법한 야외 테이블들과 벽 하나 없이 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주방, 여러 크기의 통나무들이 굴러다니는 목재소, 철문이 훤히 열린 마구간, 띄엄띄엄 낮은 자세로 앉아있는 산장들까지. 모든 것들이 늦여름의 어둠 속에 조용히 잠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저 멀리 하나의 점이 된 나무를 쳐다봤다.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에 나올 법한 자연이 그곳에 있었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목장 주인의 집에서 보았던 보더콜리들이 신나게 달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차 한 대도 눈에 띄었다. 이대로 밖에서 자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주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보더콜리들은 경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마냥 꼬리를 흔들며 제 집으로 우릴 안내했다.


- 안녕하세요. 전 Raykwon인데요......

- 안녕하세요. Susan이라고 해요.


현관문 너머로 웃는 인상의 할머니가 답했다. 짧게 구불거리는 회색 머리, 동글동글한 얼굴에 어울리는 선한 눈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도톰한 볼살이 Susan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런데 무슨 볼 일로,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오다가다 들를 만한 위치도 아닌데 말이다.


- 일주일 전에 B&B를 예약했는데요. 아침 승마도요.

- 일주일 전이라......


저하고 통화했었는데 기억나세요? 그의 질문에 Susan은 생각나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듯 연신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 아아, 이제 기억나요. 내 정신 좀 보라지. 달력에 적어둔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 따라와요.


Susan은 우리가 걸어온 거리를 두 배쯤 느린 속도로 되밟아 갔다. 보더콜리들도 종전과는 다르게 얌전히 주인을 따랐다. 다만 신이 난 꼬리만큼은 숨기질 못한 채. Susan이 안내한 B&B 건물은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일층의 한 편엔 키친과 다이닝 룸이, 맞은편엔 작은 바와 함께 놓인 파티 룸이 목적을 잃고 방치된 상태였다. 이층에 자리한 거실과 욕실, 방 세 개는 오직 목재와 말 장신구만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침대 프레임과 서랍장, 말발굽을 이용한 옷걸이와 카우보이 모자를 씌운 램프만 보아도 주인의 섬세한 손길이 엿보였다.


- 전부 남편이 만든 거예요.


경이로운 눈빛으로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를 향해 Susan이 말했다.


- 그 양반 솜씨가 좋아서. 여기 목장의 집들도 다 직접 짓고 목재소에서 가구며 장신구며 혼자 만들어서 살림을 꾸렸죠. 이곳에 터를 잡은 게 40년 전인데 그동안 말에 미치고 나무에 미쳐서......

- 그럼 이 목장에서 두 분만 지내시는 건가요?

- 남편은 밴쿠버의 딸 집에 갔어요.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을 다니느라. 그래서 한동안 목장도 문을 닫았었는데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고 해서 다시 열었죠. 아들이 오면 우린 곧 은퇴할 예정이에요.


참, 방은 원하는 대로 골라요. 어차피 다른 손님도 없으니. Susan은 부드러운 말씨로 굿나잇, 하고 덧붙이고는 다시 느릿느릿 제 집으로 돌아갔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전부 같은 뒷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등 뒤로 그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세상에, 이 침대 짜임새 보여? 이건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만든 거라고.


이 서랍장은 어떻고! 목공소 알바를 자처할 만큼 원목 공예에 빠져 있던 그의 입에선 감탄의 말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나무의 짜임새 따위 알지 못하는 나는 대신, 젊은 남녀가 첩첩산중의 목장에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을 상상했다. 구글 맵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때마침 저 멀리서 코요테와 같은 울음 소리가 들렸고 곧 보더콜리의 응답 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밤을 설명하자면 불편하면서 안락하고, 코 끝이 시리면서 발가락은 따뜻했던 시간이라 하겠다. 우리의 방문을 까맣게 잊고 있던 Susan이 물탱크를 잠가버린 바람에 샤워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 꿉꿉한 기운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거라고 고대했던 아침 승마 계획도 Susan의 희미한 기억력 덕분에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쯤 되면 아무래도 좋았다. 느린 걸음과 웃는 얼굴을 가진 할머니 앞에선 그냥 아무려면 어떨까 싶은 마음. 산속 여름밤은 그 공기가 차서 이불 밖 코 끝과 이불 속 발가락의 온도 차에 몇 번인가 잠에서 깨야 했다. 그때마다 코요테가 울었고 보더콜리가 응답했다. 사실 나를 먼저 깨운 게 찬 공기였는지 코요테였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여기 좀 봐봐.


 그날 밤, 몇 번째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창가에 서서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여기, 별들 좀 봐봐. 추위를 미처 떨치지 못한 내가 이불을 감은 채 그의 옆에 서자 무수한 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창틀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별들은 마구마구 쏟아져 내렸다.


- 이렇게 환한 별들 본 적 있어?

- 아니.


우리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창틀을 벗어난 하늘은 끝이 없고 별들은 찬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광공해가 없는 깊은 산은 매일 밤 이렇게 보석 같은 별들을 토해내는 모양이다. 승마 따위 하지 못해도 오늘의 밤하늘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오리라. 그때도 Susan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지금처럼 있어주었으면. 깊은 산이 매일 밤 별들을 토해내듯이.


- Happy anniversary, honey.

- Happy anniversary, honey.



자기야.

나는

오늘 밤의 별들이 많이 그리울 거야.






** Photo by guille pozzi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집순이 집돌이가 세상을 구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