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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pr 11. 2020

집순이 집돌이가 세상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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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북미를 강타한지도 한 달째. 캐나다 정부는 social distancing에서 physical distancing으로 명칭을 바꾸고 시민들에게 출퇴근이나 장보기 외의 외출 자제를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메트로 밴쿠버의 많은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레스토랑과 커피숍 역시 배달과 픽업 서비스만 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거리를 활보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정부에서는 공원과 놀이터, 해변로 등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긴긴 우기를 견딘 뒤 맞은 햇살 때문일까. 봄날의 밴쿠버 주민들에게 집순이 집돌이가 되기란 꽤 힘든 도전인 듯했다.



오늘이 토요일이야? 난 수요일쯤 된 줄 알았지.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준비하던 그가 토끼 눈을 하고 내게 묻는다. 한 달째 재택근무 중인 데다 며칠 전부터 의미 없는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는 시간 개념 따위 개나 줘버린 지 오래다. 내가 출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그의 주말과 평일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수요일이라니. 내가 주말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주전자에 물을 얹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갓 간 커피빈 향기가 우리 사이를 가득 채운다. 드르륵드르륵. 손으로 직접 갈아야 맛이 좋다는 그의 철칙에 따르려면 아침 커피를 마시기까지 꽤나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물이 먼저 끓을까, 커피가루가 먼저 완성될까. 그러고 보니 골수 집순이 집돌이의 사소한 일상은 제아무리 어마 무시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많은 것이 달라진 요즘. 문득 그의 변함없는 아침 의식이 감사히 여겨진다.

 

코로나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의 리츄얼



시무어 마운틴에 있는 등산로 기억나? 거긴 사람들이 없으니 physical distancing 지키기에 완벽할 텐데.


물이 먼저 끓었다. 그는 다소곳하게 내가 마실 커피를 먼저 내어주며 작년 봄에 함께 올랐던 산을 떠올렸다. 그리 멀지 않고 비교적 한산하며, 평탄하게 이어진 하이킹 코스가 맘에 드는 곳이었다. 더 자주 오자고, 올해는 집에만 있지 말고 여기저기 다니자고 약속했건만. 우리는 집순이 집돌이 운명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 떠난다면 좋을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그린우드.


그가 자신의 커피를 만드는 동안 나는 손에 든 머그컵을 후후 불며 답한다. 그린우드. 몇 해 전 로드트립 중 우연히 들른 곳으로, 광산업이 저물며 600여 명의 주민만 남은 BC주의 가장 작은 마을이다.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자리한 건물들이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시내라고 불리던 도롯가는 꽤나 아기자기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기에 박물관에 들려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3대째 이어온다는 베이커리에서 맛있는 시나몬 빵에 커피를 곁들이며 쉬어갔던 곳. 그곳이라면 온 세상이 난리를 겪는 지금도 왠지 평온했던 모습 그대로 일 것 같다.


신기하네. 팬더믹의 중심에서 화려한 휴양지보다 고요한 장소들이 떠오른다는 것이.

그러게... 다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을 텐데. 대신, 에센셜 워커로 분류된 나는 매일 출근을 하고 그는 침대와 소파에서 혼자만의 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토록 집을 좋아하는 우리였는데, 지금 유독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건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Mt Seymour & Greenwood


심란한 마음을 이기려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각자 할 일에 빠진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카페에서 즐기던 보통의 시간들이 거실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창 밖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다. 콩나물시루 같아야 할 출근길 트레인에 혼자 있을 때 느끼는 묘한 기분이라든가, 잠옷 바지 차림에 셔츠만 단정히 차려입고 온라인 회의를 하는 그의 낯선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휴지를 한 칸 한 칸 세고 있을 때나,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한 채 마트 앞 대기 줄에 합류하는 순간엔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괴팍한 장난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여야 하겠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오늘 저녁에 피자 만들어 먹을까?

밀가루를 살 수 있으면. 요즘 밀가루가 화장지 다음으로 구하기 힘든 거 몰라?

그럼... 저녁 대신 맥주를 배부르게 마시자!


그가 한 달 새 두둑해진 뱃살을 흔들어 보였다. 집에 갇힌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몸무게는 0.1톤에 근접하는 듯했다. 뭐, 그래도 괜찮다. 모두의 삶이 건강한 일상을 되찾을 때쯤이면 그 역시 짐에서 호되게 운동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꿈도 꿔보지 못했던 현실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때는 이전에 몰랐던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악수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 줄을 서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는 것, 원 없이 친구들을 만나고 어디든 마음껏 떠날 수 있는 것. 무엇보다 이 힘든 시기에도 건강을, 직장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Physical distancing.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집순이 집돌이의 역할을 저버리지 말자. 

그러고보니 집 커피가 제법 맛있다.

 

제일 먼저 찾고 싶은 평범한 일상





** Cover photo by Dhaya Eddine Bentaleb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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