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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ur day까지 겹친 긴 연휴였다. 집 앞 공원에서 만난 친구와 각자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한가운데 고귀하신 치킨님을 모셔두고 널찍이 떨어져 앉은 꼴이 우스웠지만 이렇게라도 만나야 했다. 밴쿠버는 곧 우기에 접어들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올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너른 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니 행복했다. 어떻게든 고민을 찾아내는 것이 취미인 내가 무장 해제된 순간. 잠시 코도 골았던 것 같다. 치킨 때문인지, 친구가 만들어 온 술떡 때문인지. 마취된 채 수술대에 오른 환자처럼 나는 돗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였지 싶다. 내 몸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 화요일 출근길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에는 미열이 일었고 콧물과 기침이 따라왔다. 수요일은 회사 대신 병원을 갔다. 10시에 문을 여는 코비드 검사 센터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가 9시였다. 한 시간이 지나 번호표를 받아 들고 두 시간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오갈 데 없는 대기조 사람들은 땡볕 어딘가의 그늘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구석의 작은 덤불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져간 책의 절반을 읽었을 때 내 차례가 왔고, 테스트는 일 분도 안돼 끝이 났다.
결과는 하루 이틀이면 알 수 있지만 모든 증상이 멈출 때까지 회사로 복귀할 순 없었다. Work from home? 유치원 선생에게 재택근무란 달나라 여행만큼 생소한 단어다. Take care, 이라고 말하던 매니저는 내가 겨울 내내 잔기침을 달고 산다는 것을 모른다. 나 다시 일하러 갈 수 있을까.
금요일에는 코로나 음성 결과 판정을 받았다. 몸 상태는 진즉 나아졌지만 간헐적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출근은 무리였다. 비루한 통장 잔고보다 넉넉한 유급 병결 휴가, 냉장고 안에서 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식재료들을 보며 일단 걱정은 넣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난 외출 따위 필요 없는 집순이 아니었던가.
할 일은 많았다. 늘 시간에 쫓겨 내일로, 다음 주로, 다음 달로 미루던 일들을 찾아내려면 끝이 없었다. 당장 끝내야 할 학교 과제와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 욕조의 찌든 때도 눈에 들어왔고, 넷플릭스의 최신 영화도 보고 싶었다. 우선 가뿐한 마음으로 빨래를 돌렸다. 역시 최고의 향수는 세탁용 세제라니까. 괜히 베갯잇을 씌우며 킁킁거리기도 하고 얼굴도 비비적거리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하, 이런 시간 부자의 여유라니.
이건 정말 큰 일이다. 시간이 없을 땐 해야 할 일들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시간이 많을 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창 밖으로 바라본 세상은 뿌연 연기에 가려 모든 것이 희미하다. 잠깐이라도 입을 열면 모래가 잘강잘강 씹히기라도 할 것처럼, 저 아래 미국에서 일고 있는 산불의 입김이 여기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일은 비가 온다 하니 좀 나아지려나. 비가 오고 추워지면 코로나가 더 극성일 텐데, 차라리 연기가 나으려나. 몸은 게으르자 하는데 머리는 생각이 많다. 역시 집 밖은 위험해.
직장 동료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부 차 연락했다는 동료는 일주일 간 유치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하며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코비드로 변화하는 현실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경영진과 근무환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는 급기야 회사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Nobody cares about us. 그녀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팬데믹이 시작된 초기, 아이들이 무서워할 수 있으니 선생들은 마스크를 쓰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 이제 유치원 내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바뀌었지만, 회사에 대한 실망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동료는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걸까. Job search? 나는 오늘의 할 일에 'Job search'를 추가하고는 세심하게 물음표를 달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세제의 향기가 남아있는 베개의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 긍정 회로를 돌렸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게 어디야. 산불이 걱정이지 미세먼지가 뭔 걱정이야. 돌아갈 직장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다행이야를 중얼거리는 사이 스멀스멀 잠 기운이 올랐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가 알던 세상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시간이 많을 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더라.
** Photo by Aditya Chinchur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