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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n 16. 2021

피아노를 샀다는 거짓말


#_


- 오늘 정말 잘 치는데? 요즘 실력이 부쩍 늘었어.


볼펜으로 손바닥을 치며 박자를 맞추던 선생님이 말했다. 웃음을 감출 수 없던 나는 짜릿한 무언가가 발끝의 미세한 감각까지 타고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 선생님한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짙은 화장품이나 향수와는 다른 무언가. 조용하고 나긋한 말투와 잘 어울리는 그런 냄새였다. 열 살의 나는 선생님과 기다란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시간을 아침부터 기다리곤 했다. 건반을 두드릴 때의 느낌과 선생님을 만난다는 사실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설렘이었다.


- 참, 그래서 피아노 샀니?


네? 당황한 나는 얼른 건반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전 적당히 술에 취한 아빠한테 피아노를 사달라고 노래를 불렀고, 기분이 좋았던 아빠는 '그깟' 피아노 하나 사주마 하고 화답했었다. 우리 아빠가 피아노 사주신대요! 신이 난 내가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에게 자랑을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다음날 이어진 엄마의 잔소리와 '그 비싼' 피아노를 사줄 순 없다고 아빠가 말을 번복한 사실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나마 몇 가지 브랜드를 추천받은 뒤로 나의 새 피아노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오늘, 하필이면 왜 피아노를 잘 쳐서는 선생님이 그 사실을 떠올리게 했을까. 나는 입술을 잘강잘강 씹었다. 눈길은 여전히 건반 끝에 매달린 채.


- 네.


역시 말할 수 없어.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빨개짐을 느꼈다. 어차피 학원에서 가정방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뭐람.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열 살의 마음을 휘저었다. 이게 뭐 대수인가 생각하며 스스로를 구슬려봤지만 피아노를 샀다는 거짓말은 무거운 돌덩이처럼 나를 짓눌렀다. 영원히 선생님의 눈을 쳐다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입은 멈추지 못했다.


- 영창 피아노 샀어요.

- 어쩐지. 집에서 연습 많이 했나 보구나. 학원에서만 치는 거랑 집에서도 치는 거랑 확실히 다르지.


선생님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연습 많이 하렴. 나는 피아노 없이 어떻게 피아노 연습을 많이 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피아노가 없는 건 나 밖에 없을 거야. 사실이야 어찌 됐든 내 마음속 학원 친구들은 전부 크고 좋은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집에 있는 거라곤 바람을 불어야 소리가 나는 멜로디언과 종이 건반이 전부라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엄마, 미워.


그 뒤로 며칠 동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열심히 멜로디언을 불었다. 피아노를 샀다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연습을 해야 했지만, 체르니 30번의 악보를 연주하기에 멜로디언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저녁 시각이 되면 멜로디언 가방은 책상 및 구석에 꽁꽁 숨겨졌다. 퇴근길에 우리 집 앞 골목을 지나가는 선생님이 혹시라도 나의 비밀을 알게 될까 불안했던 것이다. 어제 너네 집에서 멜로디언 소리가 나던데. 피아노 산 거 아니었어? 어머, 너 거짓말했니? 어느 날 밤에는 그토록 다정했던 선생님이 차가운 표정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어휴, 꿈이라서 다행이지.


내 실력이 늘지 않은 까닭인지 선생님은 더 이상 새 피아노에 관해 묻지 않았다. 다만 나는 여전히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 줄 아시면 어쩌지? 이미 알고 계신 건 아닐까? 걱정하는 새 마음속 돌덩이는 새끼를 치듯 자꾸만 무거워졌다. 사실대로 말해야지. 매일마다 다짐했지만 선생님과 나란히 의자에 앉으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선생님, 저 피아노 없어요. 거짓말이에요. 내일은. 내일은 꼭 말해야지.


- 피아노 학원 이제 안 가도 돼.


왜요? 왜?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안달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 싱크대 정리에 바빴다. 돈 없어. 언제나 직설적인 엄마의 화법은 쿨하고 매력적인데 열 살의 내가 이해할 범주는 아니었다.


- 왜 돈이 없어요? 나 피아노 학원 가고 싶은데!

- 적당히 칠 줄 알면 됐어. 이제 컴퓨터 학원 다녀. 엄마는 돈 없어서 두 개 다 못 보내.


컴퓨터 학원은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좋다며 눈물 콧물을 짜내는 일도 통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남들 배우는 것만큼은 다 가르쳐보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었지만, 그 역시 열 살의 내가 이해할 범주는 아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애꿎은 멜로디언 가방만 내동댕이쳤다. 엄마, 정말 미워.


다음 원비를 내기까지 며칠 더 남아있었지만 나는 다시 피아노 학원을 가지 못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피아노를 치는 것도 슬펐고, 그 마지막 순간에 나의 거짓말을 고백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예 학원을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으니 차라리 낫겠지. 철없는 마음 탓에 좋아하던 선생님과의 작별 인사도 나누질 못했다. 오늘도 연습 많이 하렴. 그게 피아노를 쳤던 마지막 날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가기 직전 피아노 학원은 사라졌다. 그 옆에 나란히 놓였던 복덕방과 과일 가게도 허물렸다. 대신 상가를 겸한 작은 빌라가 들어섰지만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재개발의 붐은 물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급속도로 번져서 동네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보다 깨끗하고 세련된 건물이 늘어나는 것에 반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선생님의 얼굴 역시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의 나긋했던 목소리와 은은하게 풍기던 향기만 생각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샀다는 거짓말과 그때 내가 느낀 죄책감은 마치 얼마 전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선생님과 미처 나누지 못했던 마지막 작별 인사의 섭섭함과 후회까지. 그 모든 감정들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거짓말이라는 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겨 마음속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났다. 나는 그 뒤로 몇 번의 거짓말을 보태고 얼마의 죄책감을 키웠을까.


언젠가 성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듣던 엄마가 내게 물었다. , 너도  정도   있지? 기도를 앞두고 내가 답했다. 아뇨. 그러게 체르니 30번은 끝내게  주지. 우리는 나란히 앉아 성호를 그었다. 이젠 젊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할  있는 나이가 되었다. 거짓말은 그만큼의 죄책감이 따라온다는 사실도.  그땐 말하지 못했을까.



선생님,

저 영창 피아노 없어요.





** Cover Photo by Geert Pieter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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