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Apr 27. 2020

엄마 딸, 착한 딸


#_


짤랑.

어깨에 멘 가방끈을 잡고 경쾌하게 움직일 때마다 얇은 쇠붙이가 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막다른 골목 끝에 삐딱하게 튀어나온 녹색 대문. 걸음을 멈추자 짤랑거리던 소리도 덩달아 멈췄다. 가까이서 본 대문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슬었다. 아홉 살의 나는 방금까지 짤랑거리던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 열쇠 목걸이는 책가방과 함께 아무 데나 내팽개쳐졌다. 몇 시쯤이었을까. 이른 오후의 집은 언제나 고요했다.


촤악.

프라이팬에 올린 계란이 기름에 지글거렸다. 또래 중에도 유독 작았던 나는 요리를 하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으로 끌어온 의자 위에 올라섰다. 언니와 같이 라면을 끓여본 적은 있지만 혼자서 불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그까짓 거 뭐. 좁은 주방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부지런한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밥을 지으며 낡은 공간을 닦고 또 닦았다. 아빠가 제일 먼저 출근을 하고 우리 자매가 등굣길에 나서면, 엄마도 동네의 작은 공장으로 향했다. 작은 딸 올 때까지만. 엄마에게 주어진 근무 시간은 어긋나기 일쑤였다. 몇 번인가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경험 끝에 내 목에는 열쇠 목걸이가 걸렸다. 자식들 배 채우려 시작한 일 때문에 어미도 자식도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홉 살의 나는 여기저기 기름을 튀기고 소금도 흘리면서 금세 주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지. 계란 프라이를 얹은 밥 위에 케첩을 아낌없이 둘렀다. 꿀꺽. 흰쌀밥과 케첩의 달콤한 냄새에 입 안으로 침이 고였다. 아이 씨, 엄마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달칵.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섰다. 무거워보이는 짐들을 양 손에 쥔 엄마는 추를 달아놓은 저울대 같았다.

세상에, 너 뭔 짓했어? 내가 가스레인지는 건들면 큰일 난다고 했지?

기대와 다른 엄마의 반응에 맘이 상한 나머지 울음이 삐쭉삐쭉하고 새어 나왔다.

엄마 먹으라고 만들었단 말이야! 내가 안 먹고 기다렸단 말이야!

엄마는 그제야 들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고 식탁을 살폈다. 엉성한 계란 프라이가 케첩에 첨벙 빠져있는 모습을. 화를 낼까 말까 고민했을 엄마는 숟가락 두 개를 챙겨 식탁 앞에 앉았다.

같이 먹자. 느이 언니 오기 전에 우리끼리 몰래 다 먹자. 살다 보니 딸내미가 해준 밥을 다 얻어먹네.


투둑.

늦은 점심을 먹은 우리는 거실 한구석에 자리를 깔고 엄마가 가져온 전자제품 조립에 열중했다. 두 개의 플라스틱 부품들은 제대로 맞물릴 때만 투둑, 하고 소리를 냈다. 단가가 얼마였는지는 모르겠다. 반찬 값이라도 벌고 싶었을 엄마는 공장 부업을 마치면 그날 집에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양을 추가로 가져오곤 했다. 작은 부품들을 만지는 엄마의 손은 거친데 반해 아홉 살 내 손은 섬세하고 날렵했다.

방에 가서 얼른 숙제나 해.

한두 번씩 잔소리를 하는 엄마도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언니 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응?

맞은편으로 완성된 제품들이 쌓여갔다. 엄마는 종종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날은 무슨 내용이었더라. 고무줄 끊고 도망간 사내놈들을 쫓아가 혼쭐을 내줬다던가, 엿장수에게 집에 있던 냄비를 팔고 엿을 샀다가 할머니한테 된통 맞았다던가 하는 이야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의 재밌는 일화는 모두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둘이서 시시덕거리다 보면 엄마의 부업은 쉽게 끝이 났다.




'착한 딸'이 되기 위한 평생의 도전은 내가 처음으로 계란 프라이를 만들던 날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정해진 기한도, 성패의 기준도 없는 효도. 아홉 살의 내가 마흔이 된 지금, 그 도전은 어디쯤 머무르고 있을까. 엄마를 위해 식사를 차리고 그럴듯한 선물이나 용돈을 챙길 때마다 나의 '착한 딸' 성공 지수는 껑충 뛰었을까.

 

착한 딸? 그럼! 엄마 딸, 착한 딸이지.

휴대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밝고 환하다. 그렇게 따기 어렵다는 효도 점수도 엄마가 매기면 나는 늘 백점이다. 건강하니까 백점, 착실하니까 백점, 잘 살고 있으니까 백점이란다. 엄마가 정한 '착한 딸'의 기준점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딸이 행복하면 그만인 것이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 중 하나가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도전 참 싱겁다. 먼 타국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녹색 대문 집에 살던 아홉 살의 나로 돌아간다. 우리는 좁은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 전자제품을 조립하고 있다. 투둑. 엄마가 어렸을 때 말이야, 투둑. 제품이 완성될 때마다 엄마의 재밌는 이야기도 하나씩 더해진다. '착한 딸'이 되기 위한 나의 도전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성공과 실패라는 이름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도전. 엄마 딸, 착한 딸.




**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십 년짜리 여권이 만료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