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3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해에 여권이란 걸 만들었다. 혹여 닳지는 않을까, 거추장스러운 케이스에 곱게 끼운 여권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이십 대의 내가 있었다. 최대한 예쁘고 좋은 인상으로. 실물보다 잘 나오기로 유명한 사진관에서 여권 사진을 찍었다. 귀를 드러내야 한다는 법은 있어도 이를 드러내지 말란 법은 없던 시절이었다.
참 뜨뜻미지근하구나, 내 삶은. 매일 아침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에 몸을 싣으며 생각했다. 모범생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늘 거기까지였다. 나는 특별한 능력자도, 엄청난 열정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매달 통장에 박히는 저렴한 숫자가 내 젊음의 값어치일까. 중탕 같은 이십 대의 시간들이 유독 서글펐던 날, 비행기를 탈 계획도 없이 여권 1호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익숙한 루틴을 벗어나 냉탕이든 열탕이든 뛰어들 각오로.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친구가 노래를 부르던 홍콩을 목적지로 정했다. 많은 생명을 위협했던 사스는 자취를 감춘 뒤였지만 여행 상품은 여전히 저렴했다. 아, 이게 유명한 홍콩의 밤거리구나. 화려한 불빛에 따라 내 마음도 일렁였다. 음식은 맞지 않았고, 단체 관광 일정에 꼼꼼하게 끼어있던 건강식품 판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뭐랄까. 내 힘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랄까.
여권 1호는 나의 이십 대가 끝남과 동시에 그 기한이 만료되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야근은 많고 휴가는 적은 현실. 세계 곳곳의 도장을 여권 1호에 새기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마음을 비우듯 통장을 비우니 몇 번인가의 출입국 도장이 추가되었다. 집순이인 내게 사실 해외여행의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다 한 번씩, 내 삶을 둘러싼 뜨뜻미지근한 기운이 답답하게 여겨지면 여권 1호를 챙겨 들었다. 막내 작가로 일하던 프로그램이 종영됐던 스물넷, 업무 스트레스로 응급실에 실려갔던 스물여섯, 이직 후 반복된 야근으로 허리 디스크를 앓던 스물여덟, 망해가는 회사를 퇴직했던 스물아홉까지. 고군분투했던 나의 이십 대에게 주는 훈장들처럼 여권 1호에는 출입국 도장들이 듬성듬성 새겨졌다. 그 모든 시간들이 홍콩의 밤거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래도 중탕 같았던 이십 대를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천천히 익어가는 삶은 계란처럼.
2.
2008년. 여권 2호를 만들었다. 1호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관에서 이번엔 '웃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나는 눈썹과 귀를 드러내며 무표정 속에 입을 앙다물었다. 그닥 예쁘지도, 좋은 인상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뭔지 모를 결의가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서른, 모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미혼, 의견을 조율해야 할 상대가 없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있잖아. 무직, 때려치울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네. 경우에 따라 달갑지 않을 수 있는 수식어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기에 간편한 구실이 됐다.
서른의 나는 하버브릿지 위를 달리는 트레인을 타고 스시집으로 출근했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한다는 워홀러였지만 집순이의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일 년을 꼬박 시드니 시내의 집과 스시집 반경에서 크게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특별하진 않지만 여유로운 날들. 싱거운 해외생활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을 땐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여권 2호를 붙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지?
서른하나의 나는 이민 가방 두 개를 들고 밴쿠버에 왔다. 셰어하우스와 학교가 있는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일 년이 반복되었다. 컬리지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면 그대로 정착할 심산이었다. 뜨뜻미지근하고 싱거운 삶. 어디까지 계획대로 될진 알 수 없어도 어떤 온도의 삶이 내게 맞을지 조절해보고 싶었다. 자글자글 끓여도 보고 소금도 한 꼬집 넣어 휘휘 저어보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여권 2호에는 한국의 백수, 호주의 외국인 노동자, 캐나다의 유학생 신분으로 도합 여섯 개의 출입국 도장이 찍혔다. 스물아홉에서 서른하나 사이. 그즈음이면 완전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겨우 이 년의 수명을 마친 여권 2호 속 사진을 보며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삶은 조금 더 따듯하고 짭조름해졌으니까.
3.
2010년. 밴쿠버 영사관에서 여권 3호를 만들었다. 급하게 찾아간 다운타운의 사진관은 잡화점 구석에 작은 디지털카메라와 엉성한 조명을 구비하고 있었다. 여길 사진관이라고 광고하면 사기 아닌가요,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권 사진이 예뻐서 뭐에 쓰냐. 귀를 보이기 위해 머리를 넘기니 짧게 자른 앞머리가 솥뚜껑을 덮은 듯 가지런해 보였다. 체념 상태로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은 나 못지않게 주인아저씨도 무심하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원 모어. 찰칵. 오케이. 정말 오케이인 거죠? 묻고 싶은 말을 애써 삼켰다. 그래, 사진이 대수는 아니니까.
사진은 대수였다. 십 년간의 해외 생활 동안 쓸 여권에 박힌 사진이라면 더더욱이나. 신분증명서라곤 여권 3호가 유일하던 시절, 술을 파는 liquor store를 들릴 때마다 점원은 여권 3호 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보며 두 번째 아이디를 요구하곤 했다. 이거 너 맞아?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읽을 때면 조용히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긴 얼굴, 솥뚜껑 앞머리. 그래도 두 번째 아이디가 필요하니? 나 역시 무언의 표정으로 응답했다. 잘 나온 사진을 쓸 걸. 여권을 꺼낼 때마다 후회한 적이 손가락을 세고도 넘었다.
여권 3호는 내 삼십 대의 행적을 대변했다. 너저분하게 찍힌 출입국 도장들은 버라이어티 한 여행보다는 해외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에 가까웠다. 미국 달러가 캐나다 달러보다 쌀 때는 버스를 타고 시애틀까지 달려가 쇼핑을 했다.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 살았기에 미국을 이웃집처럼 넘나드는 것이 가능했지만 캐나다 달러의 강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졸업생 비자를 받을 때도 국경을 넘어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 서부를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목적지인 벨링햄에 내렸다. 그 작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며 여권 3호에 도장을 찍었다. 쾅쾅. 출입국 관리 직원이 워크퍼밋 비자를 허가했다.
일 년 뒤 다시 국경을 찾았다. 두 시간이 넘게 제자리걸음인 차를 주차하고 먼 거리를 걸었다. 주말을 맞아 미국으로 넘어가는 수많은 차들을 옆에 두고 혼자 걷는 기분이 묘했다. 저 멀리 단풍을 새긴 국기가 펄럭였다. 거기가 캐나다의 끝이었다. 이번엔 국경을 넘는 대신 바로 출입국 관리 직원을 만났다. 여권 3호와 함께 이런저런 서류들을 보여주는 동안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날이 선 직원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반해 나를 응대한 직원은 트레이닝 중인 신참이었다. 그가 여권 3호에 도장을 찍은 뒤 작은 캐나다 국기를 내게 건넸다. Welcome to Canada! 캐나다에 온 지 삼 년 만이었다. 진짜 웰컴의 기운을 영주권자가 된 뒤에 처음 느꼈다. 캐나다 국기를 건네는 신참 직원의 손도, 건네받는 내 손도 떨리고 있었다.
4.
2019년 12월. 새해가 오기 전에 여권 4호를 만들었다. 이제 영사관에는 여권 사진을 무료로 찍을 수 있는 디지털 기계가 마련돼 있다. 클릭 몇 번이면 자동으로 여권에 새겨 나온다. 예쁨을 기대할 만큼은 아니지만 편리함으론 최고다. 찰칵찰칵. 또 다른 십 년을 함께 할 내 모습이 스크린에 떴다. 역시 예쁘진 않다.
그렇게 십 년짜리 여권 3호가 만료되었다. 2010년 대가 끝났고 나의 삼십 대도 끝났다. 해외 생활 십 년. 내겐 출근해야 할 직장이,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통장과 처리해야 할 공과금이, 제발 그만 어지럽히라고 잔소리할 신랑이 있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집순이의 하루. 더 이상 어색하고 불편한 해외 생활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다. 쓸모가 없어진 여권 3호를 서랍에 넣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2020년이 올 줄이야. 내가 마흔이라니. 문득 여권 1호에 박힌 이십 대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평생, 나는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반문도 든다. 어른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여권 4호의 나는 여권 1호의 내가 꿈꾸던 모습일까. 글쎄. 아무렴 어떠냐.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나이를 먹으며 특별할 것 없는 오늘 같은 삶을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간이 딱 맞는 따듯한 수프 같은 오늘이 계속된다면, 것도 제법 괜찮은 인생이지 싶다.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여권 4호를 손에 쥐고 나는 사십 대에 입성했다.
(한국 나이 마흔하나는 비밀이다.)
** Photo by WanderLab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