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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Oct 01. 2019

'글쓰기'라는 첫사랑


#_


시작은 일기였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은 마지못해 일기장을 숙제로 제출했지만 나는 은근히 그날을 기다렸다. 내가 보고, 겪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면서 하루하루는 귀하고 특별한 순간들로 다가왔다. 일기에 재미를 붙인 데는 담임 선생님의 몫도 컸다. 별 다섯 개가 박힌 '참 잘했어요' 도장 대신, 선생님은 늘 장문으로 아이들의 일기에 화답하곤 했다.


너는 작가를 하면 좋겠구나.


어느 날의 일기 끝에는 딱 한 줄의 글이 붙어있었다. 작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에게 한 번씩 그런 글을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화가를, 너는 과학자를, 너는 발명가를 하면 좋겠구나. 혹은, 너의 꿈은 무엇이니? 와 같은 글을. 뜻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적어준 한 줄의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은 각자의 꿈을 적어 게시판을 꾸미기로 했다. 단연 인기 있는 직업은 선생님, 과학자, 의사였다. 대통령도 두 명이나 되었다. 나는 작고 희미한 글씨체로 '작가'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작가. 게시판을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서 등골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뭐? 태지 부인? 네가 서태지랑 어떻게 결혼할래?

왜 못해? 방송국 가서 만나면 되지.


다행히도 아이들의 관심은 짝꿍의 꿈에 꽂혀 있었다. 뭐? 작가? 네가 작가를 어떻게 할래? 누군가 내게 물었다면 난 짝꿍처럼, 왜 못해? 하고 응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지 부인. 나는 짝꿍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내 이름으로 삼행시 하나만 지어주라.

나도, 나도!


작가라는 꿈이 주목을 받게 된 건 아이들 사이에서 삼행시가 유행할 때였다. 나는 부탁받은 이름들을 공책에 적어놓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써야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그깟 세 줄을 만드는데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완성하는데 또 한나절. 삼행시가 며칠에 걸쳐 완성되는 동안 아이들의 관심은 딱지치기나 구슬 따먹기, 공기놀이 따위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름 공들여 완성한 글 치고 아이들의 반응 또한 시큰둥했다.


아아, 그 삼행시... 근데 좀 재밌게 써주지.


뭐어? 작가? 웃기고 있네. 돌아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네가 쓰지 그래?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과 맞아, 작가는 아무나 하나, 하고 기죽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치. 괜히 쓸데없는 짓 했네.... 순간의 묘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열두 살. '쓴다'는 행위를 통해 좌절을 배웠다.





#_


한국 영화 산업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세기말. 나는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뜬구름 잡는 생각이 한국 영화라는 대세를 만나 내린 결정이었다. 내가 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떨까? 어린 시절 꿈이었던 '작가' 앞에 '시나리오'라는 단어를 붙이니 왠지 더 그럴듯했다. 시나리오 작가. 그래, 그거 참 듣기 좋다.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 치고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학부제의 특성상 원치 않는 과목도 수강해야 했다. 어떤 날은 독백 연기 시험을 봐야 했고 다른 날은 재즈댄스를 배워야 했다. 성격에 맞지 않는 수업은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재수할까? 아직 스물인데.


세분화된 전공 수업을 들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영화학 개론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실험 영화 수업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20세기 영화를 대표한다는 '시민 케인'을 볼 때마다 꾸벅꾸벅 졸기를 수 차례. 나는 그제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아, 나는 영화를 볼 사람이지 만들 사람이 아니구나.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재수할까? 아직 스물 하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기적 어기적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거지 같은 생각이었다. '영화'의 영도 모르고 '시나리오'의 시도 모르면서 무슨 베포였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시나리오 작법 시간에 무엇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할 말이 없다. 그나마 실험 영화나 '시민 케인'을 볼 때처럼 졸진 않았다.


너무 심오한 거 아니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이야기에 클라이맥스가 없지 않냐?

이건 블록버스터야? 우리한테 이런 제작비가 어딨어?


졸업 작품을 위해 쓰기 시작한 단편 시나리오는 동기들에게 난도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치고 고쳐도 시나리오에선 패배의 피비린내가 났다. 그래? 네 글은 어떤지 한 번 보자. 팔을 걷어붙이고 복수의 칼날을 갈아보지만 동기들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재 감독 봉준호는 단편 영화 '지리멸렬'을 만들고, 나 같은 보통내기는 '지리멸렬'한 시나리오만 쓰는 게 현실이었다. 서로의 시나리오를 향한 거침없는 난도질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병든 닭이 되었다. 눈 껌뻑이는 소리가 들릴만큼 조용한 순간. 그 끝은 늘 한 동기 녀석에 의해 깨지곤 했다.


결말을 바꿔 봤는데 어때?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별로야? 다시 써볼게.


그의 시나리오가 항상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 그를 우리는 '시나리오 공장장'이라고 불렀다. 공장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는 들어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붙였다. 결말이 수십 번도 넘게 바뀌었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새로운 시나리오를 썼다.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꾸준히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도 그 녀석처럼 꾸준하면 필요한 순간마다 이야깃거리가 툭툭 튀어나오는지.


그해 여름. 나는 너덜너덜해진 시나리오로 졸업 영화를 찍었다. 공장장 녀석을 흉내 내며 이야기를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지만 부족한 실력을 메꿀 수는 없었다. 에라, 졸업이나 하자. 더 이상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즈음 공장장이 몇 수십 번째 시나리오를 들고 어느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는 소식이 들렸다. 역시 쓸 사람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난 글렀어. 시나리오 작가는 아무나 하나... 스물셋. '쓴다'는 행위를 통해 포기를 배웠다.





#_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은데?


동네 호프집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반건조 오징어를 질겅 씹으며 물었다.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500cc 맥주를 들이켰다.


방송 작가. 괜찮지?


뭐가 괜찮은 건진 몰라도 소리 내어 말하니 더 그럴듯했다. 어쩐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하긴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니 덕에 방송국 구경이나 가보자. 동창은 맥주잔을 비우고는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는 한창 인기였던 '인어 아가씨'가 방영 중이었다. 극 중 방송 작가였던 장서희 덕분에 그해 방송 아카데미가 대박 났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들은 사실이었다.


방송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짧은 시간 동안 MBC, KBS, EBS로 맡은 프로그램을 따라 옮겨 다녔다. 사람들이 권 작가, 혹은 작가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여전히 등골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나를 작가라고 불러도 될까? 막내 작가는 잡일을 많이 하기에 '잡가'라고도 했다. 겨우 백만 원 남짓의 월급을 받으며 야근을 반복했지만 해야 할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일요일. 갑작스러운 오전 회의가 잡혀 방송국에 들어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업무를 주도할 윗선은 오후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중요한 볼일이 있겠지. 백만 원 받는 나도 이렇게 바쁜데. 나는 노트북을 붙잡고 다음 주 방송의 예고 자막을 쓰기 시작했다. 회의는 늦은 저녁 시각으로 미뤄졌다. 빈둥거릴 시간 동안 섭외 전화를 돌리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았다. 부장님 곧 오신대요. 누군가가 외쳤다. 노트북을 오래 봤더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잠깐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멀쩡하던 눈알이 부장님 오실 때 빠지면 큰일이니까. 나는 저녁의 찬바람을 맞으며 정문에 서서 방송국 건물을 바라봤다.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일까.


그러게 부장님은 왜 그렇게 늦게 오셔서는. 정신없이 바쁠 때는 잊고 있던 온갖 생각이 동시에 일었다. 나는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간단한 방송 홍보 문구도 똥줄이 타도록 끙끙대다 겨우 만드는 수준인데. 그것 역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수정의 수정을 거듭했다. 잡일이 많다고 툴툴거렸지만 사실은 대본을 쓰는 날이 올까 두려웠다. 온천하에 내 실력이 드러나는 날 말이다. 스물여섯. '쓴다'는 행위를 통해 두려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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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나의 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연인 같았다. 넌 내게 어울리지 않아. 마성의 매력을 지닌 그가 이별을 고하면 나는,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넌 내 첫사랑이야. 하고 질척거리는 식이었다.


스물여섯 겨울에 '작가'라는 직업을 반납했다. 밥만 먹고 잠만 자는 잉여 생활을 반복하다가 잠시 작은 부띠끄의 카피라이터가 되기도 했다. '쓴다'는 행위에 좌절과 두려움을 느끼고 쉽게 포기하면서도 자꾸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정말 질리도록 질척거렸다.


변화는 서른에 찾아왔다. 캐나다라는 새로운 환경에 둥지를 틀고 전혀 다른 직업을 가졌다. 낯설고도 흥미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글쓰기'는 점점 내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역시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행복했다. 되지도 않는 글을 쓰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첫사랑이 생각났다. 몇 시간 동안 두어 줄 쓰는 게 고작이어도 어떻게든 빈칸을 채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누가 잘한다 잘한다 하지 않아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다시 쓰고 싶었다. 뭐어? 작가? 웃기고 있네.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큼 마음도 단단해졌다. 뭐, 하루 정도는 눈물을 훔치겠지만.


작년 여름부터 브런치를 시작했다. 여전히 두어 줄을 쓰려면 한나절이 걸려서 발행 수가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사실 더 큰 흠은 글의 질에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말랑말랑해진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작은 것에도 울고 웃을 줄 아는 나. 소소로운 것에 의미를 두고 간직할 줄 아는 나. 써야 하기 때문에 쓰는 글이 아닌,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을 만지는 나의 마음은 아이처럼 맑아진다. 좌절을 맛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포기를 일삼게 했던 '글쓰기'라는 행위가 이제는 나를 치유하는 행위가 되었다. 작가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 지금, 글을 쓰는 나는 행복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첫사랑을 잊을 수 없다.




** Cover photo by Dariusz Sankowsk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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