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희(喜). 곰국, 2004
상순은 김치가 전공이었다. 커다란 고무통 가득 배추를 절여두고 무, 갓, 마늘, 양파를 손질하고 나면 고춧가루와 배를 담뿍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딸내미 어린 시절 머리를 빗어 넘겨주듯, 상순은 배추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속을 채우고 난 뒤 보기 좋게 말아 그릇에 옮겨 담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펼 새도 없이 만든 김치는 저녁상에서 수육과 짝을 이룰 때 최고의 맛이 났다. 휴, 이제 한시름 놓았네. 오늘 저녁은 이걸로 됐어. 당분간 온 가족 김치 걱정은 안 해도 될 터였다.
사실 상순의 걱정은 따로 있었다. 김장을 하느라 무리한 까닭인지 이곳저곳 몸이 쑤셨지만 그녀는 바로 다음 날 다시 장을 보러 나섰다. 우족, 사골, 소꼬리, 사태, 시금치, 미역. 상순의 손에 쥐어진 꼬깃꼬깃한 종이 조각에는 갓 출산을 한 첫째 딸과 사위를 위한 먹거리 재료가 가득 적혀 있었다. 자식들의 끼니 걱정. 그것에 비하면 김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 애들이 나는 도시락 반찬으로 맨날 김치만 싸오래. 엄마 김치가 젤 맛있다고.
상순의 김치가 언제나 인기만발이었다면 그녀가 만든 찌개는 실패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큰 손을 타고난 상순의 찌개는 늘 국물이 넘쳐났고, 함께 넣은 식재료들은 본연의 맛을 잃은 채 둥둥 떠있는 식이었다. 별다른 반찬 투정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낸 딸들도 상순의 찌개가 식탁에 오르는 날이면 자신들의 불평을 함께 올렸다.
- 엄마, 이게 국이야 찌개야?
- 또 재탕했지? 이게 무슨 섞어 찌개도 아니고.
기지배들, 맛있기만 하구만.
상순은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나면 남은 찌개에 찬밥을 말아먹었다. 그렇게 먹어도 먹어도 남은 찌개는 다른 찌개와 함께 섞어 재탕을 하기도 했다. 딸들의 언성은 재탕 찌개를 볼 때 더 높아졌다.
그랬던 첫째 딸이 상순에게 손녀딸을 안겨주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면서 늘 밑반찬을 퍼다 주었지만 출산 이후이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먹성 좋은 사위마저 홀쭉해지면 어째. 이런저런 생각에 마트에서 식재료를 고르는 상순의 손이 더욱 분주해졌다.
집에 돌아온 상순은 제일 먼저 우족과 사골, 소꼬리를 한데 놓고 핏물을 빼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기다리는 동안 멸치볶음, 두부조림, 시금치무침, 소고기 볶음 등 여러 찬거리도 만들어 한편에 두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소뼈가 담긴 큰 솥의 물에 선홍빛이 어렸다. 핏물을 버리고 다시 새물을 채우길 몇 차례. 주방의 창 너머로 어둠이 찾아올 즈음에야 상순의 솥은 가스레인지의 뜨거운 불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제 한강인 물을 펄펄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 끓인 물을 버리고 소뼈를 하나하나 씻어내는 수고로움은 들었지만 엄청난 손맛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진득하니 기다리면 되는 음식. 그게 곰국의 묘미였다. 미역을 넣고 끓이면 딸이 먹기 좋고, 심심하게 간을 해서 밥을 말으면 사위가 먹기 좋을 것이다. 곰국에 김장 김치. 맛있겠구만. 상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밤 열두 시에도 곰국이 담긴 솥은 끓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식구들은 진즉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상순은 쉬이 눕지 못했다. 진득하니 오래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깊게 우러나는 곰국의 맛을 위해 상순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주방 곁을 지켰다.
이건 찌개가 아니라 국이니까 잔소리 없이 먹겠지.
힘들게 추켜올리는 눈꺼풀에서 피곤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일은 더 바쁜 날이 될 것이다. 상순은 아침 일찍 음식을 챙겨 첫째 딸의 집으로 갈 예정이다. 미역국도 끓여주고 밀린 집안일도 해줘야지. 엄마가 잘 먹어야 모유도 잘 나올 텐데...
상순이 곰국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도 곰국처럼 뽀얀 손녀딸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은 얼굴. 피곤하지만 참으로 기다려지는 내일이었다.
#_ 로(怒). 고기반찬, 1962
사 남매는 소반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큰 오빠는 일찍부터 농사를 지었고 작은 오빠는 공부를 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밥을 짓고 상을 차리는 것은 언니의 몫이었다. 상순은 설거지를 하는 것도 싫어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착한 언니가 해야 할 일은 두배가 되었다.
시골 마을에는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엄마가 장에 나가 이것저것 파는 동안에도 밭에서는 온갖 먹거리들이 상순의 키보다 빨리 자라났다. 덕분에 사 남매의 밥상은 제법 풍성했다. 오이절임이나 가지무침, 파김치 같은 반찬은 물론이고 아욱이나 근대를 넣은 된장찌개도 늘 상에 올랐다. 갓 따온 깻잎을 된장과 함께 보리밥에 싸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 밥 좀 더 퍼와.
논밭일로 얼굴이 까맣게 그은 큰 오빠가 뚝딱 고봉밥을 비우면 상순은 짐짓 모른 채 딴짓을 했다. 알았어, 금방 가져올게. 군소리 없이 일어나는 언니의 등 뒤로 책을 보던 작은 오빠도 한 마디를 얹었다. 나는 물.
제아무리 풍성한 밥상이어도 고기가 올라오는 날은 흔치 않았다. 친구들과 멱을 감던 상순이 강가의 다슬기나 개울가의 가재를 잡아오면 색다른 먹거리가 되었지만 고기반찬은 그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 고기가 가장 풍성한 때가 있다면 그건 마을에서 돼지 잡는 날을 의미했다. 어느 집에선가 돼지를 잡으면 사람들은 먹고 싶은 만큼 사가곤 했는데, 때로는 나눠먹을 만한 음식들을 가지고 삼삼오오 모여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나눠먹는 음식은 고기뿐이 아니었다. 상순의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지나가던 보따리 장사꾼들이 종종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들은 아무 집 대문 앞이든 넓은 자리가 있으면 짐을 풀고 물건을 팔았다. 상을 고치는 이도, 그릇이나 고무신을 파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어둑어둑해지면 자연스럽게 대문 주인과 함께 저녁을 먹고 때로는 잠도 자고 가곤 하는 게 마을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 상순아! 밥 두 공기만 더 퍼와라!
그날은 무슨 연유였던지 엄마와 상순 둘 만이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다들 집에 없는데 밥을 왜 더 퍼라지? 상순이 흘깃 돌아본 마당에는 누추한 행색의 남녀가 서 있었다. 장사꾼의 모습의 아닌, 그야말로 거지에 가까운 행색이었다. 엄마는 그새 조그만 상을 하나 더 펴고 있었다.
- 찬은 별거 없어요. 그냥들 잡숴.
엄마의 한마디에 쭈뼛거리던 이들이 마루에 올라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들의 단정치 못한 모습이 상순의 눈에 더 들어왔다. 여기저기 헌 옷에다 소매에는 까맣게 때가 눌어붙어 있었다. 상순은 입을 삐쭉거리며 마지못해 밥술을 떴다. 그런데 아까 볶은 가재는 어디 갔지? 순간 그들의 상에 올라가 있는 가재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내가 오랜만에 잡아온 건데! 상순은 숟가락을 탁, 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 나 밥 안 먹어!
엄마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상순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을 어귀 원두막에 앉아 있었던가, 풀밭에서 대충 굴러다녔던가. 상순은 심부름 갔던 언니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그 꽁지에 붙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꼬르륵. 점심을 굶은 까닭에 뱃속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다.
하필이면 그날, 어느 집에서 돼지를 잡았다. 상순이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동안 엄마는 큼직한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사들고 왔다. 배 안 고파? 안 고파! 저놈의 기지배 본새 하고는! 엄마는 왜 가재를 날름 다 그 사람들만 줬대? 내가 잡아 온 건데! 사람들이랑 나눠먹기 싫어! 이런저런 큰소리가 오가고 엄마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 그럼 넌 고기도 안 나눠 먹겠네?
안 먹어, 안 먹는다고! 상순은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닥타닥. 아궁이에 불 지피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화로에 불을 옮겨 담고 프라이팬을 얹었다. 촤악. 돼지고기가 뜨거운 열기에 구워짐과 동시에 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상순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보았지만 허기에 찬 배를 꾹꾹 찌르는 고기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 고기반찬이 얼마만이야. 누구네 집 돼지래?
- 저기 순영이네서 잡았단다.
- 밥 좀 더 퍼와.
- 난 물.
달그락거리는 젓가락 소리에 상순의 배가 요동을 치며 대꾸했다. 이러다 진짜 고기반찬 다 먹어치우면 어째. 지금 와서 밥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배고픔이 커질수록 상순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나도 돼지고기 먹고 싶은데...
- 어여 인나서 밥 먹어. 승질 좀 죽이고.
언제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벌어진 입 사이로 고인 침을 닦으며 일어난 상순에게 엄마는 소반을 내밀었다. 총각김치, 다슬기가 들어간 근대국 그리고 보리밥 옆으로 상순이 먹을만치의 돼지고기가 놓여 있었다. 고기반찬이다! 상순은 체면치례 할 것도 없이 냅다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엄마, 고기반찬 맛있다!
언제 그렇게 성을 냈냐는 듯이 상순은 엄마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놈의 지지배를 어떻게 말려. 엄마도 그런 딸이 밉지 않은지 고기반찬을 슬쩍 상순의 앞으로 당겨주었다. 배가 부른 그날 밤은 유독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_ 애(哀). 잔치국수, 1975
상순이 식을 올린 곳은 친정이 있는 원주였다. 먼 친척의 중매로 만나 몇 번을 만나고 결정한 결혼이었다. 집은 넉넉하지 않지만, 칠 남매의 장남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는 친척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그래도 그렇지, 택시 타고 시댁으로 가는 길을 신혼여행이라 치자니. 그게 말이 된다니.
식을 마치고 택시를 기다리는 상순의 옆에서 속이 상한 엄마는 연거푸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런 자리가 불편했던지 새신랑은 저만치 떨어져 장모의 눈치만 봤다. 이거라도 가져가. 됐어, 괜찮아. 가진 돈을 죄다 꺼내 손에 쥐어주려는 엄마와 상순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동안 저 멀리서 택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 저희 먼저 갑니다.
- 엄마 갈게요.
상순이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 오르는 순간을 틈타 엄마는 냅다 차 안으로 돈을 던져 넣었다. 아 글쎄, 가지고 가라니까. 권서방, 내 잘 부탁하네. 신랑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택시는 곧장 여주를 향했다.
- 뭔 말이라도 좀 해 봐. 화난 거야?
원주를 빠져나가 여주읍이 보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입이 댓 발 나와 있던 상순의 모습에 신랑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상순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차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포장도로는 점점 좁아져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고 저 너머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는 그중에도 가장 낡아 보이는 집 앞에 멈춰 섰다. 하이고. 착한 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 상순의 입에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정도면 넉넉하지 않은 게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진부한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 부모님은 버스 타고 오시려면 좀 더 걸릴 거야.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
쌩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신랑을 보자 상순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람이 착해 빠져서는.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도 못 가는 게 어딨냐고. 신혼방에 대충 짐을 풀고 상순은 구석에서 쪽잠을 청했다. 그래도 둘이 힘 합쳐 열심히 살면 형편은 나아지겠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주머니 안에서 엄마가 던져준 지폐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신혼 첫날. 어쩐지 서글픈 시간이 흘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난 상순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아무리 부족하게 살아도 장남이 결혼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한테 대접은 해야 쓰지. 시어머니가 마당에 자리를 깔자 이웃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 이가 녹두가루로 청포묵을 만드는 동안 어느 이는 절구에 빻은 찹쌀밥에 예쁘게 콩고물을 얹어 인절미를 만들었다. 시아버지는 큰 맘먹고 기르던 돼지 한 마리를 잔치에 내놓았다. 절인 배추와 파가 들어간 부침개가 노릇노릇 익는 동안 갓 잡은 돼지도 고추장 양념을 입고 있었다.
- 어머니 전 뭘 하면 될까요?
- 손도 느리게 생겼구먼 무슨. 새색시는 앉아서 손님 대접이나 잘하고 있어라.
시어머니의 한 마디에는 쌩하니 찬바람이 불었다. 집안일에 서툰 손 때문인지, 그냥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상순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철없는 막내딸에서 어느 집 맏며느리로의 신분 변화가 버거웠을 뿐. 혼이 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눈물이 찔끔 났다. 상순은 곁눈질로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하기에 바쁜 신랑을 흘겼다. 서러움이 폭발할 때마다 애꿎은 신랑만 자꾸 미운 사람이 되고 있었다.
부엌의 가마솥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잔치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시어머니가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만든 육수에 막 잔치국수를 만드는 참이었다. 상순은 마당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꼬르륵. 배는 고팠지만 이상하게도 먹을 수가 없었다.
- 이거 맛 좀 봐봐.
신랑이 커다란 쇠그릇에 담긴 잔치국수를 상순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여적 아무것도 못 먹었지. 그의 눈이 상순의 얼굴을 훑자 주책맞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가 볼세라 냉큼 찍어낸 눈물은 상순의 소매를 적셨다.
- 어머니가 하셨으니 맛이야 좋겠지, 뭐.
상순은 젓가락을 휘휘 저어 국수 가락을 건졌다. 한 입을 먹고 나니 왠지 모를 서러움과 배고픔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이 곳이 우리 집이야... 새삼 주변을 둘러보던 상순의 눈에 신랑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머니 국수 진짜 맛있네. 상순은 그릇째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신혼 둘째 날. 잔치국수와 함께 눈물을 삼키는 동안 어스름한 달빛이 내렸다.
#_ 락(樂). 갈비찜, 2018
밴쿠버 국제 공항. 국경 심사를 하는 직원의 날카로운 눈빛에 상순은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여권과 귀국행 비행기표, 둘째 딸의 연락처와 집주소가 적힌 영문 편지까지 몽땅 보여주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쩐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쾅, 쾅. 이윽고 도장을 찍은 직원이 여권을 돌려주며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상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은 그쯤의 의미일 것 같았다.
- 엄마!
- 어머님, 안녕하세요.
입국장을 나오는 상순을 본 둘째 딸이 호들갑스럽게 달려들고 그 뒤를 사위가 따라붙었다. 어머님, 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위의 한국어 실력이 제법 좋아진 듯했다. 그래 그래. 오래들 기다렸지. 얼른 집으로 가자. 상순은 마음이 급했다. 한국에서 고이 싸온 음식들이 상해버리면 큰일이었다. 열 시간의 비행과 밤낮이 바뀌어버린 시차.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상순의 눈이 차에 타자마자 무겁게 내려앉았다.
- 이거는 깻잎 장아찌, 이거는 오징어채 볶음, 그리고 저거는 집된장이야.
상순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부터 열었다. 단단히 쌌던 포장을 벗기고 음식물을 용기에 옮겨 담는 신성한 작업이 이어졌다. 자, 그리고 이거는 너 좋아하는 젓갈. 상순이 꽁꽁 얼려 온 젓갈을 꺼내 보이자 딸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 내가 요즘 젓갈 먹고 싶었던 걸 어떻게 알았대? 이 명란젓은 참기름에 찍어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오늘 저녁은 이것만 먹어도 배부르겠네. 신이 난 딸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순의 마음은 이미 진수성찬을 먹은 듯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사위는 어쩐담. 냄새가 강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먹을만한 반찬이 보이지 않았다.
- 저스틴은 이거 못 먹지? 잡채 먹을래? 이따 잡채 만들어줄까?
천천히 말하면 사위가 알아듣기라도 할 듯 상순은 또박또박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잡채? 잡채, 오케이. 한국어로 묻고 영어로 대답해도 간절하면 통하는 법이었다. 사위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딸과 꼭 닮은 미소를 지었다.
상순도 처음부터 백인 사위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한 달을 함께 지내는 동안 쓰는 언어도, 먹는 음식도 다른 탓에 꽤나 고생한 기억이 있다. 한국 음식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 상순과 맵고 강한 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위가 한 식탁에 앉으려면 그날의 메뉴를 한참이나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가족이 되기 위해 서로의 다름을 맞춰가던 시간. 그때 상순은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바로 사위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들을 찾아내는 것. 불고기, 비빔밥, 해물파전, 그리고 잡채는 단연 인기가 좋은 메뉴들이었다. 잠깐 쉬었다가 바로 요리를 시작해야지. 태평양을 건너와서도 상순의 걱정은 저녁거리였다.
몇 시쯤 되었을까.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푹 자고 말았다. 상순이 잡채를 만드려고 서둘러 주방을 나가보니 앞치마를 두른 사위가 보였다. 한쪽에 앉은 딸은 일을 돕기는커녕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두는 모양새였다.
- 어머나, 이거 갈비찜 냄새 아니야?
- Yeah, this is Galbi.
딸이 상순의 밑반찬들을 꺼내는 동안 사위는 국물이 자작해진 갈비찜을 식탁에 올렸다. 간장 양념을 입은 고기와 당근, 감자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 엄마, 저스틴이 이거 만들어 드린다고 몇 번을 연습했는지 몰라. 난 덕분에 갈비찜 물리도록 먹었지.
아이고, 세상에. 상순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사위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 어르신 먼저 드시고 먹어야지. 내가 갈비찜 요리만 알려주고 예절을 안 알려줬네.
- 괜찮다, 괜찮아.
상순도 이어 갈비찜을 한술 떴다. 한국에서 먹던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맛있네. 우리 사위가 요리를 이렇게 잘하는구나. 칭찬은 용케 알고 사위가 땡큐,라고 대답했다.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온기. 상순에게 세 식구의 식탁은 바다 건너 낯선 땅이 아닌 한국의 익숙한 보금자리와도 같았다. 내일은 꼭 잡채를 만들어줘야지. 그리고 또 무슨 음식을 해줄까. 떨어져 사는 가족과 모처럼 함께할 수 있는 즐거움. 상순은 지금 이 순간이 더디게 흐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