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과 낡음에 관한 단상
봄이 왔다. 골목 사이사이마다 어느새 꽃이 피고 녹색빛이 돋아났다. 언제 이 많은 생명들이 탄생했는지. 마치 꽃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을 틈타 순식간에 팡, 하고 팝콘처럼 터져 나온 것 같다. 여름이 오기까지, 아니 봄비가 후드려치기까지, 꽃들은 그 짧은 시간을 우리네 한평생처럼 열심히 살고 시들어가겠지. 매일같이 보아도 눈치채기 힘든 느리고 지속적인 변화.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겪어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생명은 늙고 사물은 낡는다.
저 건물만 없으면 참 예쁠 텐데.
함께 산책을 하던 신랑이 맞은편 회색빛 건물을 가리켰다. 모든 것이 반짝이는 햇살 좋은 날, 유독 그 우중충한 모습이 눈에 띄였다. 얼마나 오래된 건물일까. 7층 정도의 비교적 낮은 높이에 비해 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데다, 요즘처럼 비싼 땅값에도 넓은 지상 공간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2,30년의 역사는 됨직했다. 그거 알아? 예전에 이 건물이 호텔이었던 거. 여기 일층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어. 밴쿠버 주변 지역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신랑이 짐짓 아는 체를 했다. 흠, 그래? 호텔과 나이트클럽이라. 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화려한 과거를 가진 건물이 문득 궁금해졌다. 오래전 이곳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S 빌딩. 구글에 나온 몇 가지 기사를 조합해 보건대 건물은 내 생각 이상으로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올해로 55년 차. S 빌딩은 2005년에 주인이 바뀌면서 기존의 클럽과 호텔 대신 사람들이 월세로 계약할 수 있는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20대 때 자주 가던 곳인데 막상 사라진다니 아쉽다. 요즘 누가 한물간 클럽을 드나들겠어, 진즉 없어졌어야지. 호텔이나 클럽이 아니라 건물 자체를 허물어야 해. 너무 낡고 보기 흉해. 당시 지역 신문 기사에는 몇몇 주민들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한때는 이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을 장소. 이 도시에서 가장 최신식이었을 건물. 조금씩, 조금씩. 매일같이 보아도 눈치채기 힘든 느리고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S 빌딩은 그렇게 낡아가고 있었다.
#_ 토요일 밤의 열기, 1998
친구들 중 가장 늦게 18살 생일을 맞은 아만다. 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그녀를 위해 친구들은 다운타운에 새로 생긴 클럽을 찾았다. 오랫동안 제법 큰 호텔로 유명했던 S 빌딩은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 덕분에 최근 더 큰 활기를 띠고 있는 듯했다. 늦은 시각을 무색게 하는 불빛들과 길게 늘어선 줄. 그 줄이 시작되는 클럽 입구에서는 강한 인상을 지닌 가드가 사람들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만다는 들뜬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창 유행 중인 배기 셔츠를 입은 사람들 속에서 반다나를 활용한 탱크톱 패션은 그녀를 단연 돋보이게 했다. 새로 산 하이힐 덕분에 그녀의 발끝이 저려오는 게 문제였지만.
아만다와 친구들은 위층의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Happy Birthday, Amanda! 친구들이 건네는 술을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제 진짜 성인이야. 아만다는 기분이 좋았다. 마시고 있는 술 때문인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토록 들뜬 토요일 밤은 처음이었다. 난간 너머로 내려다본 아래층에서는 DJ의 음악 사이로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이 함께 섞여 춤을 추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의 중심에 있는 기분. 어느새 아만다도 저려오는 발끝을 무시하며 그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다운타운의 화려한 주말. 클럽과 호텔 안 붐비는 사람들로 S 빌딩의 밤은 쉽게 잠들지 않았다.
#_ 가장 저렴한 렌트, 2019
Rent starting from $650.
S 빌딩 입구의 전광판에는 650이라는 숫자가 빛을 잃은 건물 대신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층 뒤편의 Liquor Store(주류를 판매하는 가게)를 제외한 건물 내부가 렌트용 주거 공간으로 변한 것은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오기도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650불? 850이 잘못 적힌 거 아니야? 나는 전광판 불 하나가 닳아 8 대신 6으로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긴. 요즘 시세에 $850의 월세를 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에이, 언니. 거기 안돼요. 마침 이사를 가야 하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걱정하던 지인에게 S 빌딩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단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몇 해 전 두어 달 그곳에 살아 본 경험이 있었다. 여기는 한국 같지 않고 오래된 건물들이 워낙 많잖아요. 겉은 허름해도 안은 관리를 잘하기도 하고, 인테리어를 새로 싹 하기도 하니까. 뭐 괜찮겠다 생각했죠. 위치도 좋고 렌트도 정말 저렴하고.
그녀는 원 배드 유닛을 둘러보고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S 빌딩은 과거 호텔이었던 덕에 높은 천장과 넓은 창문이 나 있는 것은 물론 중앙 냉방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주방과 화장실이 조금 낡은 것 말고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이 정도 가격에 이 집이면 어디야. 그녀는 자신의 탁월한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말이다.
긁적긁적. 그녀는 S 빌딩으로 이사 온 뒤부터 이상하게도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이 예민해진 까닭이라 생각했으나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가려움에 곧 그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두드러기 같은 붉은 반점이 돋았다. 알고 보니 그 건물에 베드 버그가 득실 한 거 있죠. 워낙 오래된 건물인 데다 관리도 부실하더라고요. 언니 그거 알아요? 베드 버그 한번 생기면 웬만한 물건 다 버려야 하는 거. 이삿짐에 달라붙어서 다른 집으로 옮겨가도 다 따라온다니까요. 그녀는 당시의 가려움이 떠올랐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베드 버그만 있는 줄 알죠? 쥐도 다녀요. 얼마나 잘 먹는지 정말 크다니까. 650불 아니라 65불이라도 난 안 살고 싶어.
Over 900 homes and 40 storeys!
S 빌딩에 관련한 최근 기사에는 이런 문구가 붙었다. 55년의 역사 끝에 곧 그 자리에도 두 채의 고층 콘도들이 들어설 모양이다. 이곳의 성향 상 S 빌딩의 철거가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만. 여전히 $650이라는 숫자가 전광판에서 반짝이는 걸 보면 당장 내일 벌어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잘 됐네. 보기도 안 좋은데 빨리 철거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전해준 S 빌딩 소식에 신랑은 반색을 표했다. 그 크고 화려했던 건물의 슬픈 결말이라니. 신랑과 달리, 나는 사물의 낡음이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New Westminster. 과거 BC주의 주도였던 이 오래된 도시에는 살고 있는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느낌의 건물들이 잔재한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 큰 공원을 끼고 나란히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집들은 대부분 지은 지 수십 년에서 백 년 가까이 된 경우이다. 아기자기한 정원이나 문짝 하나만 보아도 주인의 정갈한 손길을 짐작할 만한, 오랜 세월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그런 집들. 사람으로 치면 품위와 연륜을 갖춘 어른 같다고나 할까. 그런가 하면 S 빌딩처럼 오랜 세월과 함께 꾸준히 낡기만 한 건물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지어질 당시의 매력을 간직하지 못한 채 그저 도시 외관을 방해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운타운에 새로 들어서는 고층 콘도들. 껑충 뛰어버린 집값을 보면 저 많은 새로운 콘도들을 누가 다 살까 싶지만, 그건 아마도 나만의 기우일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지어지는 새 건물들이 오래오래 잘 보전되어 백 년쯤 뒤에도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오래된 도시에는 늙은 것과 낡은 것,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도시의 탄생과 함께 생긴 것들은 별 볼일 없이 낡아 사라지거나, 고풍스럽게 늙어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무언가가 낡아서 사라진 자리 위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것들이 다시 생겨나 끊임없는 역사를 만들어 간다.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지속적인 변화.
나는 별 볼일 없이 낡고 있을까, 고풍스럽게 늙고 있고 있을까.
** S 빌딩은 실제 건물의 이름과 다릅니다.
** 표지 사진 출처: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