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감동도 영혼도 없는 여행기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으름과 후천적으로 다져진 집순이 성향의 적절한 조화 때문일까. 나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마음보다 '집에서 알차게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더 지배적인 사람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_ 내게 있어 익숙한 촉감의 이불 아래 누워 밀린 드라마를 보는 낙은 하루 종일 낯선 길을 거닐며 남의 동네 구경하는 것에 견줄 바가 못 된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가끔 여행을 간다. 여행 전날 밤 밀린 숙제를 하듯 (누가 가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짐을 싸고, 여행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맛집 리스트랄까) 수집한 채.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특별히 달라질 건 없다. 나는 날씨가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툴툴거리며 (돈을 투자했으니) 어쩔 수 없이 관광에 나선다. 개도 못주는 게으름 탓에 일출 감상 트레킹은커녕 호텔 조식 챙겨 먹기도 벅차고, 무미건조한 성격 앞에는 자연의 위대함도 그저 초록빛은 산이요, 푸른빛은 강일뿐이다.
그렇게 귀찮고 피곤하며 통장에 구멍만 남기는 여행은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나서야 그 끝이 난다. 그리고 그날 밤. 까슬까슬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여행지에서 보았던 풍경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았네_ 까무룩 밀려오는 잠의 물결 속에서 나는 피식 웃고 만다.
'나쁘지 않았던 여행'은 시간을 덧입고 기억에서 추억으로 진화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익숙한 내 집 한구석에 누워 그 추억을 씹고 또 씹는다. 그 시간이 반복될수록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여행의 맛은 깊어지고, 나는 어느새 낯설었던 남의 동네와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아, 여행 가고 싶다_
설핏 잠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혼잣말이 참 우습다.
#_ 불꽃같은 서른을 위한 여행
2007년. H언니가 서른을 맞은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같이 가자. 우리는 함께 살았다. 아담한 체구가 닮아 옷도 같이 입었고, 건성 피부용 화장품도 함께 썼다. 그것은 친언니와도 해보지 않은 경험이었다. 게다가 나는 시간 많은 (그러나 돈은 없는) 두 달 차 백수였다. 그래, 같이 가자_
H언니가 열심히 사전 조사를 하며 여행을 계획하는 동안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막 수익이 나기 시작한 펀드를 깼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사를 통해 저렴한 15박 16일 유럽 호텔팩을 예약했다. 완전한 배낭여행은 '나이가 있어서'(응?) 피곤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잠만큼은 편안하게 자야지. 언니는 예약된 호텔들을 체크하며 말했다. 그래, 매번 숙박 장소 안 찾아봐도 되니까 편하겠다_ 나는 귀찮은 준비 과정을 덜어 기분이 좋았다.
15박 16일은 5개 국가를 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느 더운 나라를 경유해 겨우 도착한 7월의 런던은 우리의 생각보다 꽤 추웠다. 날씨는 왜 그렇게 주책맞던지. 비가 오다 해가 뜨다, 변덕을 부릴 때마다 내 허리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만성 야근 끝에 얻었던 허리 디스크가 여기서 재발할 줄이야. 한 손으론 우산대를, 다른 한 손으론 허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후드티를 뒤집어쓴 런더너가 여유롭게 빗속을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사람들은 나와 다른 종자들이군. 15박 중 1박째. 예측 가능한 날씨가 그리워졌다.
스위스 베른으로 넘어왔을 때 우리는 인터라켄 융프라우를 오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계획했던 날짜가 다가오자 그것마저도 꽤 귀찮아졌다. 날씨가 흐려서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못 보지 않을까? 응. 베른도 이렇게 예쁜데, 뭐. 여기서도 산은 보여. 우리는 암묵적으로 같은 생각을 지녔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융프라우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늦잠과 퐁듀, 동네 산책이었다. 참 이쁘다. 여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H언니의 감탄에 나는 아마 그러게, 정도의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동네가 예쁘긴 했다. 그 예쁜 것만 바라보는 게 조금 지루했을 뿐이지.
비교적 순탄했던 독일 뮌헨을 거쳐 도착한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트레인을 타려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밀쳐냈다. 저 여자애가 너희 지갑 훔치려고 하잖아! 깜짝 놀라 돌아본 자리에는 아주 순하고 앳되게 생긴 집시 소녀가 씨익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치기를 실패하고도 도망은커녕 여유롭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먹잇감을 놓친 아쉬움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던 그녀의 눈빛. 그 아래 내 몸도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15박 중 12박째. 삼일 뒤면 집에 간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프랑스 파리. 호텔 조식과 간단한 샌드위치, 컵라면 정도로 끼니를 때우던 우리는 남은 돈을 탕진하기로 하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조금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을 들어갔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만찬. 근데 우리 뭘 주문해야 해? 그러게. 그냥 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거 달라고 하자. 알 수 없는 불어가 난무하는 메뉴판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었다. (사실 그땐 영어라고 딱히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웨이터와의 대화는 영어 회화 학원 등록 경험이 있는 H언니가 맡았다. 쿠쥬 리코멘드....? 언니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한참을 걸려 웨이터가 육회처럼 생긴 요리를 가져왔다. 예쁘게 세팅된 플레이트 위에 놓여 있던 날 것의 무언가. H언니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어쩌냐, 너 회 못 먹잖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회를 두고!) 빵만 뜯어먹고 나온 나는 호텔에서 잠들기 전 왕뚜껑 하나를 해치웠다. 15박 중 14박째. 옆 침대에 누워있는 서른의 H언니가 말했다. 마흔 되면 또 같이 기념 여행 가자. 나는 아직 서른도 아닌데 벌써 마흔 기념 여행을 생각하자니 왠지 억울했다. 하긴 겨우 두 살 차이 때문에 서른도 마흔도 먼저 겪어야 했던 언니도 억울했을 것이다. 그래, 마흔에도 기념 여행 가자_
#_ 불협 화음 가족 여행
처제, 대만 야시장에 맛있는 거 진짜 많아! 여행 일정이랑 맛집 리스트는 내가 다 정리할 테니까 몸만 와!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나를 위해 형부는 총대를 메고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3주 간의 휴가, 열 시간의 비행.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집순이로 회귀해 티브이나 보려던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형부, 재밌겠네요!
삼대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쉽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랑곳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아빠, 한국 음식 외에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엄마와 대만의 모든 음식을 섭렵하고 싶은 형부와 조카, 그리고 '오빠가 알아서 해'를 연발하며 해외에서 새삼 수줍어진 언니. 별 감동도 없이 무심하게 동행하던 나는 별책부록이었다.
우리는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타이베이 시내 관광에 나섰다. 혼자서 저만치 앞서 걷는 아빠를 놓칠까 두려웠던 형부와 나는 '짝꿍 제도'를 마련했다. 복잡한 거리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짝꿍 찾기'를 외치면 아빠와 조카가 제일 앞에, 형부와 언니가 중간, 그리고 엄마와 내가 마지막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줄을 섰다. 엄마 아빠를 챙기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형부를 보며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짝꿍 찾기! 하고 외쳤다. 소풍 나온 말썽꾸러기 유치원생처럼 제일 앞에 조카와 손을 잡고 선 아빠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짝꿍은 왜 자꾸 찾아!!
미식가(이자 대식가) 형부와 조카는 틈이 날 때마다 대만의 다양한 음식을 즐겼다. 문제는 엄마였는데, 어느 음식점을 가나 한 구석에 앉아 조용히 과일을 꺼내 먹었다. 괜찮아. 난 이따 호텔 가서 햇반에 고추장 비벼 먹을래. 절대 다른 나라 음식을 먹지 않는 엄마의 고집은 익히 유명했기에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강요할 수도 없고) 나머지 식구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다음 날. 나는 '짝꿍 제도'에 이어 식사 때마다 갈라지는 '대만 팀'과 '한국 팀'을 편성했다. 한국에서부터 정리해둔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 리스트를 미처 클리어하지 못한 형부는 아빠, 언니, 조카와 함께 현지 음식점을 찾았고, 나는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점을 찾아갔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행복해하던 엄마. 나는 아이 같은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게 집에 있었으면 매일매일이 천국이었을 것을_
마지막 날 밤. 먹성 좋은 조카가 어서 야시장을 가자고 노래를 불렀다. 우린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잘란다. 너희끼리 다녀와라. 아빠의 말끝에 나도 살짝 목소리를 얹었다. 나도 너무 피곤해서, 까지 나왔을 때 언니가 내게 박력 있게 가방을 건넸다. 외국인이랑 얘기할 땐 마냥 수줍던 그녀가 하루 종일 못쓴 에너지를 내게 쏟아부을 모양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스린 야시장. 길거리 음식도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호주에서 게이 퍼레이드를 볼 때 이후 처음으로 사람에 깔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게이 퍼레이드나 야시장이나 압사로 인생을 마감하기엔 좀 아쉬운 장소였다. 와, 우리 뭐부터 먹을까? 진희야, 넌 엄마랑 저기 줄 서 있어. 내가 이거 먼저 사서 갈게. 신이 난 형부가 엄마 아빠를 챙길 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들을 자처하며 십 년 넘게 함께 살아온 형부. 처제 이거 얼른 먹어봐, 하고 꼬치를 건네는 그의 모습이 인파 속에서 두드러졌다. 그리고 저 멀리 길고 긴 줄의 행렬 꽁지에서 웃고 있는 언니와 조카의 모습도 보였다. 3박 4일의 마지막 날 밤. 형부, 우리 오늘 적당히 먹고 내일 집에 가서 삼겹살 꿔 먹어요_
#_ 혼자 떠나는 실연 극복 여행
실연의 상처는 위대하다. 어느 정도로 위대하냐면 한 번도 본인의 의지로 (그것도 혼자서!) 여행을 계획해 본 적 없던 집순이를 움직일 만큼, 딱 그만큼 말이다.
4박 5일, 샌프란시스코. 시 외곽에 6인실 도미토리를 예약한 것 말고는 딱히 준비된 것이 없었다. 나는 여행 정보는 현지에 가면 많이 있겠지, 라는 심산이었다. 여행 전날 밤. 밴쿠버를 떠나 자유의 영혼이 되리라! 다이어리 구석에 이 한 문장을 적고 보니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을 떠나 자유의 영혼이 되리라! 그것은 몇 해 전 적었던 또 다른 문장과 꼭 닮아 있었다. 이놈의 영혼은 떠나도 떠나도 왜 이리 자유롭지 못하단 말인가.
6월의 샌프란시스코는 너무 추웠다. 내가 겪었던 7월의 런던과 비교해 어디가 더 추울까를 (쓸데없이) 고민하다 보니 늘 따라다니던 '그놈'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오! 이것이 실연 극복 여행의 효력이란 말인가! 하고 좋아하기는 개뿔. 헤어짐의 후유증에 더해 언덕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옷깃을 여미는 내 모습이 참 초라해 보였다. The coldest winter I ever saw was the summer I spent in San Francisco_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이 진부한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행이란 걸 왔으니 무언가 하긴 해야 했다.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관광 팸플릿과 지도 하나를 들고 다운타운으로 나왔다. 피셔맨스 와프의 물개를 바라보다가 유명한 클램 차우더를 먹으러 갔지만 긴 줄을 보자마자 포기. 페리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이기에 물어보니 알카트라즈라는 섬에서 감옥 투어를 한단다. 나도 가볼까, 하고 알아보니 모두 매진이라 또 포기. 사전 정보가 없었던 나는 결국 아무 계획 없이 시내를 걸어 다녔다.
하지만 무계획에도 수확은 있었다. 걷다가 우연히 찾은 유명한 책방에서 책 두 권을 골랐고, 아주 맛있고 저렴한 (관광 책자에서 보지 못한) 스테이크 집도 발견했다. 언덕을 오르다 지쳤을 때쯤 케이블 카도 타 보았고, 주변에 있다는 성당도 찾아갔다.
나는 다음날부터 열심히 주요 관광지를 돌았다. 늦잠을 잔 뒤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빵을 알차게 먹고 밖을 나갔다가 해가 지기 전 이른 저녁에 돌아오는 식이었다. 페리를 타고 어느 섬도 다녀오고, 금문교와 예술궁전도 구경했다. 그때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서야 필름을 넣지 않은 채 하루 종일 공 셔터만 누른 것을 알게 되었다. 허무했다. 내게는 휴대폰 속 몇 장의 사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사라진 샌프란시스코의 풍경 사이로 떠오르는 '그놈'의 기억을 지워가며 애써 잠자리에 들었다. 6인실 도미토리의 빈 침대들 사이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 좋아하시네. 어서 집에 돌아가 하우스메이트들의 소음을 듣고 싶어 졌다.
시간이 지나고 남는 여행의 단상은 생각보다 참 소소하다. 그리 좋지 못한 나의 기억력에도 살아남은 그 단상은 이를테면 밤마다 여행 책자를 정독하던 H언니의 옆모습, 나란히 줄지어 걸어가던 식구들이 맞잡은 손들, 예술궁전에서 내 앞을 지나가던 빨간 자전거와 같은 것이다. 너무나 소소해서 나에겐 특별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 거기 여행 어땠어? 어디가 좋았어?라는 질문에는 딱히 적합하지 않은 대답이지만, 그래서 더 나만의 것일 수밖에 없는 여행의 단상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정말 좋지. 그래? 난 별로 기억이 없어. 우리 다음에 같이 갈까?
신랑의 한 마디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뮤직 페스티벌을 관람했던 그의 기억 속 샌프란시스코는 열기 가득 활기찬 도시로 남아있다. 실연 극복 여행지였던 나의 샌프란시스코는 춥고 외로운 도시였는데. 그래, 여행 가자. 앞으로 우리 같은 단상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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