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Feb 21. 2024

라일라의 쇼핑카트

나눔과 기다림을 배우는 놀이

#_


이른 아침, 조용한 유치원 교실. 제일 먼저 출석한 라일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끊임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퍼즐이 끝난 뒤에는 선반에 있던 장난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더니 금세 교실 한구석을 가득 채웠다.


- 라일라, 다 가지고 논 장난감은 제자리에 돌려놓자. 혹시 네가 걸려 넘어질까 걱정되는구나. 선생님이 도와줄까? Let’s clean up together!

- 아니요, 저 이거 다 가지고 놀 거예요.


선생님이 퍼즐을 집어 들자 라일라는 두 팔을 벌리며 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안 쓰는 물건들을 뒤로 숨긴 채 아이는 장난감 과일을 내어주며 말했다.


- 이건 선생님 거예요. 아무한테도 주면 안 돼요.


선생님이 과일 그릇을 손에 들고 맛있게 먹는 시늉을 보이자, 라일라가 선반 구석에 숨겨둔 주방놀이용품을 꺼냈다.


- 선생님, 제가 피넛버터 샌드위치 만들어 드릴게요.


라일라는 토스터에 빵을 굽는 시늉을 하더니 비어있는 피넛버터 통을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순식간에 샌드위치가 완성되고 주방의 온갖 장난감들이 테이블 위에 자리 잡았다. 아이가 곰인형을 위해 또 다른 샌드위치를 만드는 찰나, 친구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왔다.


- No! That's mine!


평소 주방 놀이를 좋아하는 로건이 다가오자 라일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내 거야! 안돼! 선생님이 말릴 새도 없이 아이는 로건을 밀쳐내곤 테이블을 감싼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으앙! 넘어진 로건이 연이어 울며 교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소용돌이. 라일라는 장난감을 갖고 놀기 시작하면 싫증이 날 때까지 양보하지 않았다. 지루해서 버려둔 장난감도 누군가 잡으려 하면 용케 알고 나타나 빼앗기 일쑤였다. Sharing is caring. 라일라가 다른 아이들과도 즐겁게 어울릴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나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며칠 뒤 아침, 제일 먼저 유치원에 도착한 라일라가 장난감 쇼핑카트를 밀며 교실로 들어왔다. 빨간색 손잡이와 매끄럽게 굴러가는 바퀴들이 마트에서 보는 그것과 똑 닮은 모습이다. 뒤따라 들어오는 아이의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선생님은 옅은 웃음을 짓는다. 라일라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 쇼핑카트를 유치원에 가지고 와달라는 부탁이 있던 터였다.


- 라일라가 예쁜 쇼핑카트를 가지고 왔구나. 오늘은 어떤 놀이를 해볼까? 갖고 싶은 장난감을 카트에 담아볼래?


아이는 장을 보러 마트에 온 듯 교실을 돌며 대여섯 가지의 장난감을 골랐다. 카트는 순식간에 채워졌다.


- 이제 라일라는 쇼핑카트에 담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거야. 다 가지고 논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새로운 물건을 카트에 담을 수 있어. 어때, 선생님이랑 같이 해볼까?


마트 놀이를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난 라일라는 교실 구석구석 카트를 끌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트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의 수가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번의 실랑이도 있었다. 아이는 미처 담지 못한 장난감을 손에 넣기 위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빼앗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제아무리 좋아하는 쇼핑카트가 있다 해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선생님은 라일라가 고집을 피울 때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쇼핑카트 안에 필요 없는 장난감이 들어있진 않니? 그걸 제자리에 두고 다른 걸 골라보는 건 어떨까?


울음이 잦아든 후 라일라는 카트 안을 들여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고심 끝에 인형이 테이블에 올려지고 유니콘이 그려진 작은 가방이 카트에 담겼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이 인형을 낚아채자 라일라의 마음이 금세 돌변하고 만다. 안돼, 내 거야, That's not fair!  익숙한 레퍼토리가 반복되자 선생님이 아이의 주의를 끌어본다.


- 저기 있는 다른 장난감들은 어떨까?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같이 보자. 인형은 친구가 다 쓰고 나면 다시 카트에 담을 수 있단다.


선생님은 라일라를 달래며 쇼핑카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내 관심을 돌린 아이가 퍼즐을 골라 교실 구석의 안락한 공간을 찾아들었다. 잠시 후, 앨리스가 다른 퍼즐을 들고 와 라일라와 한 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끌벅적한 교실 속 고요한 섬처럼, 작은 카펫 위의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각자의 놀이에 빠졌다.


일주일이 흘렀다. 라일라는 선생님과 정한 카트놀이의 룰에 한층 익숙해진 모습이다. 친구들의 장난감을 뺏기보다는, 차례를 기다려 원하는 것을 카트에 담는 경우가 늘었다. Mine!이라는 말 대신 Turn please! 를 배우기도 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장난감 음식을 카트에 담은 라일라가 계산대에서 놀고 있던 앨리스에게 돈을 건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Thank you! 아이는 앨리스 주변을 맴돌다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꺼내고, 피넛버터 통을 휘휘 저어 금세 샌드위치를 만들어 냈다.


- 앨리스, 샌드위치 먹을래?


라일라의 제안에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는 두 아이 주변으로 다른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찻주전자를 꺼냈고, 놀이는 순식간에 티 파티로 변했다. 아이들은 찻잔을 들고 저마다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눔과 기다림을 배우는 놀이. 라일라의 울음 대신 웃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Sharing은 아이들에게 타협과 공정을 가르친다. 하지만 3살 미만의 아이들은 대부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나이의 아이에게 양보를 강요한다면, 대부분은 눈물바다로 그 끝을 맺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유치원의 경우, 36개월 미만 아이들이 있는 Infant class와 Toddler class에는 똑같은 종류의 장난감이 여러 개 있다. 아직 자기 차례를 기다릴 줄 모르는 아이들이 싸우지 않고, 동시에 같은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시기에는 지나친 강요보다는, 내 아이가 양보를 배울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용기로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배움의 시작일 것이다.


그렇다고 3살이 넘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것이 쉬워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 또래의 아이들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어떤 것이 공정한 방법인지 깨달아간다. 3-5세 아이들이 있는 Preschool age class에서는 어린 유아기에 비해 울음과 떼가 줄어드는 대신, That's not fair!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흔히 목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을 통해 아이들이 보다 쉽게 sharing과 taking turns를 배울 수 있을까?


놀이를 통해 연습하기

두 아이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공들도 많은데 작은 하트가 그려진 공은 하나뿐인 게 문제였다. 서로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멀찍이 떨어져 공을 주고받을 것을 제안했다. 아이들은 우선 상대에게 주어야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상황을 곧바로 이해했다. 혼자 공을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함께 노는 것이 재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간단한 룰이 있는 단체 놀이는 sharing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법칙에 맞게 양보하고 차례를 기다릴 때 놀이가 잘 진행되고 재밌다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놀이로는 여럿이 하는 카드게임이나 퍼즐 맞추기, 블록 쌓기, 역할놀이 등이 있다.


책 읽기와 대화를 통해 배우기

유치원 스토리 타임 중에 "We share everything!"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 유치원을 간 주인공들이 책과 블록을 갖기 위해 서로 싸우는 이야기이다. 책에 빠진 아이들은 페이지마다 반복되는 문구를 하루종일 따라 하곤 했다. 그 문구는 바로, "여기는 유치원! 유치원에서 우린 모든 것을 나눠 쓰지! (This is daycare. In daycare, we share everything!)" 교실에서 장난감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질 때면, 나는 이 문구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We share everything! 을 외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교실의 분위기는 조금 가벼워졌다. 그 틈을 타 어떻게 장난감을 나눠 쓸지에 대한 질문을 하자 한 아이가 답했다. "선생님 머릿속 알람을 켜 주세요. 제 차례가 되면 잊지 말고 '삐!' 하셔야 해요."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들은 내용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현실에 적용한다. Sharing에 관한 책을 읽고, 어떤 상황에서 물건을 나눠쓰거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지 아이와 대화를 나눠보자. 생각지 못한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sharing을 보다 재밌게 만들 것이다.


롤 모델을 통해 배우기

나에겐 다양한 물건들을 보관한 상자가 하나 있다. 아이들은 제 품보다 조금 큰 그 상자를 '매직 박스'라고 부른다. 특별할 것 없이 조그만 장난감이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있는데, 아이들 눈에는 없는 게 없는 마술 같은 상자인가 보다. 나는 가끔씩 그 상자를 열어 아이들이 갖고 놀고 싶은 물건을 고르게 한다. 선생님의 특별한 물건들을 함께 나눠 쓰고 싶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Monkey see, monkey do. 아이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 하며 자연스럽게 학습 능력을 기른다. 집에서 만든 쿠키를 아이와 함께 이웃집에 나눠준다든지, 책을 친구에게 빌려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직접 롤 모델이 되어 아이가 일상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자. 행동은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이다.


아낌없이 칭찬하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잘못을 지적할 때보다 긍정적인 행동을 칭찬할 때 아이들은 더 큰 동기 부여와 자신감을 얻는다. '잘했어', '정말 착하구나', '훌륭해'와 같은 단순한 칭찬보다는 아이의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자. 예를 들어, "네가 친구와 블록을 나눠 쓰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장난감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본 건 정말 잘했어",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리다니 정말 훌륭해"처럼 아이가 스스로 어떤 부분이 칭찬받을 일인지 깨닫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른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 때면 가르침의 목적은 사라지고 아이와 어른 간의 힘겨루기로 변질되기 쉽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신, 아이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다른 물건들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그림 그리기나 책 읽기처럼 정적인 활동 소개, 실내에서 실외로 장소를 옮기기 등 아이의 심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들을 떠올려보자.



Photo by Fabian Centeno on Unsplash


Sharing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유아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걷기나 말하기처럼 나눔과 기다림을 배우는 것 역시 성장과정에 있어 중요한 시점이며, 그 시점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왜 내 아이는 유독 양보를 못할까? 하고 아이의 행동을 탓하기보다, 일상생활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여느 신체적 발달처럼 sharing에도 시간과 연습, 긍정적인 가르침이 필요함을 잊지 말자.






캐나다 BC주에서 Early Childhood Education과 Child Care Licensing Regulation을 공부했습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유치원 아이들과 함께 보석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Cover image by David Veksler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왈가닥 나오미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