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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asha Dec 15. 2020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영화 메멘토 리뷰

*이 리뷰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생일 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 돌이켜보니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참 철학적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음률에 맞춰, 무거운 질문을 재밌고 가볍게 던지는 능력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을 잘 구현하는 예술가를 한 명 꼽자면 내게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플롯과 참신한 구성으로 대중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오락성을 갖추면서도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메멘토’(2000)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초기작으로, 낯선 구성을 따라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다 보면 엄청난 반전 속 그가 전하고자 하는 화두가 떠오른다.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고독한 킬러이다. 목표는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아내를 강간하고 죽인 강도 ‘존. G’를 찾아 복수하는 것이다. 경찰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탓에, 레너드는 홀로 수사기록을 뒤지고 범인이 될만한 사람의 동선을 기록하며 뒤죽박죽된 진실의 조각들을 맞춘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강도를 저지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쳐서 10분 이내에 모든 기억을 잃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사고 이전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기에 새로 만들어진 기억들은 사진을 찍고, 자신의 필체로 메모를 하여 주머니에 보관한다. 절대 잊어서는 안될 정보들은 몸에 문신을 새겨 기억한다.

 영화는 레너드가 친구 테디를 죽이는 결말부터 시간을 거꾸로 한층 한층 쌓아 올린다. 동시에 흑백 처리된 스토리가 중간중간 삽입되며 두 가지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흑백 스토리는 레너드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새미 재킨스’의 일화를 들려주며 흘러간다. 새미 재킨스는 그가 보험 조사관으로 일했을 때 담당했던 인물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레너드가 보험금 지급 심사를 위해 그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자신을 알아보는 새미의 눈빛을 의심하여 정밀 검사를 받도록 조치한다. 결국 새미의 기억 상실증은 심리적 문제로 판단되어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새미의 아내는 자신의 목숨을 건 위험한 방식으로 새미의 진실을 확인한다. 결국 아내는 그의 곁에서 죽고,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새미는 보호 감찰소에 들어간다. 이야기가 끝날 때 흑백 스토리는 현재의 플롯인 컬러 스토리와 만난다. 즉 과거로부터 시간순으로 진행된 흑백 스토리와 현재로부터 역순으로 진행된 컬러스토리가 일치하는 시점에서 그가 테디를 왜 죽이게 되었는지, 존.G.는 누구인지 등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관객을 적극적으로 스토리 라인에 끌어들인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은 레너드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레너드의 기억처럼 짧게 끊어지는 스토리가 하나의 퍼즐이 되고 그 퍼즐을 맞춰가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그래서 처음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가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장면에서 주어지는 힌트를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위치시키면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시점에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맞출 때 느껴지는 희열과 놀라움은 영화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관객들에게 주는 보상이다. 영화는 오락적 쾌감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은 존재한다.’라는 레너드의 대사에서 인간은 세상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들어낸 스토리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너드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는 댓가로 삶을 지탱해나갈 이유를 찾았고,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모를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인간에게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의미와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는 곧 기억의 산물이고 그 기억은 현실을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창작물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사관인 것이다.당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와, 기억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가? 영화가 끝나고 나에게 남겨진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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