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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명 Mar 16. 2022

성장일기 <8>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1

스무 살 때부터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명상을 통해 불쾌, 쾌락에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지켜보는 연습도 했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공허해지는 듯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삶의 궁극적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 말입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열심히 하루하루 이겨내지만, 언젠가는 예고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생명체의 운명이 아닌가요.


우리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죽어버리면, 삶이란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생명체의 본질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고, 삶을 열심히 살아가지 않으면 뒤쳐지게 되니, 제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결국 살아가는 본질적인 이유가 뚜렷하게 없는데, 단순히 ‘경쟁심리’ 때문에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다들 바보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건방진 생각 말입니다. 톨스토이도 사실 그의 저서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용기 있고, 행동력 있는 자는 ‘죽음’으로써 이 무의미한 게임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굳이 살 필요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과거부터 줄곧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나 자신도 삶이 무의미하고 사악하다는 걸 오래전에 알았음에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톨스토이-


거부감이 들 정도로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정답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강제수용소에서의 이야기를 적은 빅터 프랭클의 책을 접하게 됐습니다. 제목부터 저에게 엄청난 궁금증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이렇게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삶의 무의미를 이유로 ‘죽음’을 생각하는데, 정작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책에 따르면 자살하기는 정말 쉬웠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인즉슨, 사람은 의미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도왔다고 합니다.) 죽음의 공간에서도 각자 자기만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는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스스로가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묻고 내가 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닥치는 현실에 충실하게 의미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나에게 있어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연히 니체와 조던 피터슨의 책을 읽게 되었고 그곳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삶을 왜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불확실성에 의문을 던져버리면 ‘정리와 해석’을 할 수 없기에 고정시켰습니다. 첫 번째로 인생은 고통입니다. 물론 인생에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생명의 죽음은 곧 자유의지의 소멸이라고 생각합니다.




2

사람은 주변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말입니다. 제가 주변 사람에게 준 영향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에 영향을 줄 것이고, 이는 또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 하는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현재 역시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은 이렇게 영원히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가야 할 방향, 이유를 말해줍니다.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저라는 존재의 의미이자 방향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던 피터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어젯밤 잤던 잠자리부터 정리하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죠. 작은 행동도 주변에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에 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냅니다. 유튜브에서 인상 깊은 말을 들었습니다. ‘인테그랄’이라는 수학 기호를 설명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수들을 더하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또는 주변 사람을 통해 아직 우리가 이루지 못한, 혹은 이룰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제가 하는 사소한 행동들은 세상에 영향을 적게 미치고 있고, 혹은 너무 미미해서 하든 하지 않든, 내가 살아가든 살아가지 않든 세상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유전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다르게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렇기에 각자의 역량, 성향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월등하거나, 평균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면 살아가는 의미, 세상에 기여하는 의미가 적은 것일까요? 예전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며 몰아붙였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낼까요? 정말 그분들이 우리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일을 해내는 역량의 측면이 아닙니다.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고, 삶의 의미를 좇는 것에 그 사람의 삶의 의지, 가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그럼으로써 어제 나의 존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오늘 나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력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보다 많이 작용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죠. 사람이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평균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갖고 태어났고, 그럼으로써 마냥 유전적 본능에 종속된 것이 아닌, 적어도 관찰하고 이겨낼 수 있는 역량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떠한 외부환경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궁극적 자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3


제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과하고 살아가다가 후회한다는, 혹은 마음속이 공허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박진영이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게 목적이었는데, 돈을 벌고 나니 정말 공허했다. 가치가 아닌 위치를 목표로 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입니다. 어젯밤에 친한 동생이 전화를 걸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직장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를 둬야 보다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횡설수설한 듯 해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입시가 삶의 목표였습니다. 과장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정말 그땐 그랬습니다. 입시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빠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지만,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공이 보장되는 것 같았습니다. (성공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동력장치가 없는 자동차가 앞으로 나갈 수 없듯이, 저 역시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다시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자니 저도 모르게 ‘그다음엔 뭘 하려고?’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삶에 대한 회의주의가 제 20대 전반부를 지배했습니다. 무언가 이루어보려고 해 봐도, ‘그거 이루고 나선 뭐하려고?’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작은 도전에 대한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는 대체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됐습니다. 제 첫 번째 글에도 적었듯이, 생각의 씨앗은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내와 고뇌라는 양분 없이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덕분에 6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기만 하던 녀석이 이제야 조금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은 다르고, 저에게 심각한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혹은 앞으로 하게 될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며, 힘든 시간을 이겨낸 저 자신에게, 생각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게 도와준 제가 기억하는,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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