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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명 Sep 14. 2018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나를 위한 연애 그리고 너를 위한 연애

1

 중 고등학생 시절, 그때 격변의 사춘기를 겪는 또래에선 연애의 의미가 생각보다 컸다. 연애가 세상의 전부인 듯 이성친구에게 헌신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새로운 교제대상을 찾아 나서는 친구도 있었다. 필자는 둘 중에 고르라면 전자에 가까웠다. 막내로 자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또래에 비해 특별히 멋을 낼 줄도 몰라 왁스 바르기가 전부였던 필자에겐 이성교제란 세계적인 난제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쩌다중학교 3학년때 같은 반 아이를 좋아해 계속 따라다닌 끝에 교제를 하게 되었고, 그건 내 인생에 있어 첫 연애의 시작이였다. 처음에는 떨려서 손도 잘 잡지 못했다. 지금 멜로드라마를 보면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설레하며 손가락 부터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어있는 걸 종종 느끼고 다른 채널로 돌리지만 말이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 친구와는 계속해서 교제를 이어갔다. 하지만, 수험생활에 대한 압박과 성적 스트레스는 나와 그친구를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처음과 마음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나와 그 아이는 대다수의 커플들이 헤어지듯 점점 서로가 서로에게 멀어지다 결국 헤어졌다. 그 당시에는 나에겐 첫 이별이였고, 이별의 아픔은 소주를 달게 만든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시음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때의 나는 아직 이별을 극복하는 요령을 잘 몰랐고, 모든 이별노래가 다 내 얘기처럼 들리는 대국민 공통 질환(?) 역시 처음이였다. 하지만 수능이 코앞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 한건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연애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 시간 지나면 헤어지는구나. 결혼 안할거면 헤어질건데 왜 연애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나를 떠나질 않았다.


2

  군사학교에 입학해 제복을 입고, 자기관리가 한창 충실히 선배들에 의해 되어지던(?) 신입생 때, 고등학교 동창친구 대학에 축제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밖에 나갈때도 제복을 입고 나가야 하기에,  흰색 제복을 입고 갔었다. 처음에는 너무 튀는 것 같아 제모를 푹 눌러쓰고 갔지만, 시간이 지나고 술도 들어가자 제복을 입은 것도 까먹고 정신없이 구경했다. 막차 시간이 되어 집을 가려고 친구들과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여학생 한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 없으시면 번호좀 줄 수 있어요?" 난생 처음 당해보는 '번호따기'였고, 친구들은 멀리서 놀릴거리 생겼다는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무언가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번호를 주고 집에 돌아갈 때, 넘치는 에고가 표정에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나보다 한살 위였고, 내가 축제를 보러 갔던 대학에 재학중이였다. 나를 ROTC로 알았다나. 하지만 첫 연애 이후, 어차피 헤어질 거면 왜 연애를 하나 라는 생각이 강했던 나에게, 그 아이의 마음이 들어올 공간은 부족했다. 결국 솔직하게 말했었다. " 난 사실 너에게 감정이 생기질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연락하는게 부담된다. "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 애는 나를 설득했고, "넌 나를 아직 잘 모른다"고, " 한 달이라도 만나보고 그때 다시 얘기해보는건 어떻겠냐 "고 말이다. 나는 대학 첫 연애이자 내 인생 두 번째 연애를 그렇게 시작했다. 고등학생때와 사뭇 달랐다. 그때는 야자 끝나고 잠시 얼굴 보는것과 주말에 만나서 공부하는게 데이트였으면, 대학생때는 훨씬 할게 다양했고 그렇기에 데이트 하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매일 제복만 입다보니 옷도 어떻게 입을 줄 몰라, 집에 있는 셔츠에 슬렉스만 조합해서 입었다. 여러모로 많이 서툴었던 대학 첫 연애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 역시 감정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나는 '누군가 나의 외모를 인정해줬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했지, 그 아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생때 경험으로 내 내면에 심어진 허무주의 씨앗은 감정이 생길수록 그 모습을 천천히 드러냈다. 스스로의 에고에만 집중되어 있고 허무주의까지 장착한 나의 모습에 점점 그 아이는 지쳐갔고, 그럴수록 에고가 위협받는 느낌을 받은 나는, 그 모든 불안감과 욕심을 집착으로 표출했다.  그때의 내 에고는" 날 계속 사랑해줘. 그래서 내게 있는 트라우마를 씻겨줘. 그리고 내 자존감을 높여줘 " 라고 그 아이의 귀에 대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영혼까지 지친 채로 헤어졌고 나에게는 공허함 밖에 남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니, 무언가 크게 잘못됬음을 깨달았다. 나 역시 그 아이를 좋아했지만, 나를 압도한건 그 아이를 '나를 위한 도구'로 쓰려 했다는 점이다. 내가 연애하는 방식이 잘못됬음을 깨닫자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실이 엉켜있는건 알지만, 어디서 부터 풀어야 할 지는 몰랐던 것이다.



3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이름처럼 낭만 가득한 숭고한 무엇일까, 아니면 단지 욕망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이 투영되어 예쁘게 포장된 채로 불리우는 것일까. 사랑은 이기적인걸까 이타적인걸까, 아니면 그 둘다 일까?  이기적인 거라면, 연인을 위해 배려해주는 건 설명이 안되고, 이타적인 거라면 질투라는 개념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감정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사랑 역시 그 수많은 감정 중 몇개가 섞인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 행복하고 싶어서 연애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헤어졌다, "

행복할 수 있는 연애는 무엇일까. 나와 성격이 잘 맞아 소위 찰떡궁합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 세상 어느 사람도 같은 환경에서 같은 생각을 하며 자라지 않았다. 찰떡궁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은 나와 원초적으로 다른 개체다.


*이기적이고 이타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올 것 같아, 나름대로 개념에 대한 이해를 말해보고자 한다.

이기적이고 이타적임은 중심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이기적인 것은 자신이 중심이고 이타적임은 타인이 중심이다.


 내가 한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이였다. 하지만 내 주위에서 사랑을 한답시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연애를 하며 초기에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들어주고, 하고싶다는 거 다 해주고,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 줄 것 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처음의 열정은 식어간다. 여자는 바뀐 남자친구의 태도에 실망하고, 남자는 처음과 뭐가 다르냐며 답답해 한다. 혹은 처음에는 너무 마음에 들어, 이상형이라고 생각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기대와 바람과 다른 모습에 실망하고 점점 멀어진다. 어느것이든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필자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 모두는 대부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을 다 들어주고, 하고 싶다는 걸 다 해줘도 그건 사랑을 주며 얻어지는 내 만족감을 위해서 이다. 중심이 상대방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였겠지만, 그 안을 파고 들어가보면 결국 '나'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로 인한 만족감이 덜해지고, 나에게 집중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때문에 점점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는 필자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며 겪는 필수 코스다. 우리에게 사랑은 애시당초 '나'를 위한 것이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나'를 위해 한다는 데서 온다. 질투, 실망, 권태기 등등 수많은 관계 속 문제가 적어도 둘 중 한명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둘 다 일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4


 우리는 모두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바라는 프레임을 각각 만들어 타인에게 씌운다. 문제는 이러한 프레임은 그 사람의 일부분만 보고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거나, 사회적 혹은 문화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연애가 특이한 것은 우리는 '연인' 이라는 특수한 프레임을 씌워 더욱 많은 것을 기대하고 원하는 데 있다. 사귄 날짜를 세고, 다른 이성과의 접촉을 경계하고, 자신에게 특별한 프레임을 씌워 다른 사람과의 차등화를 해주길 원하며, 헤어짐이라는 기점을 기준으로 감쪽같이 '연인' 프레임을 벗겨 버린다. 대신에 '구'여친, '구'남친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씌워, 만나기 조차 꺼려하는 사이로 만들어 버린다.


 친구와 싸우고 너 나랑 이제 절교하자 라는 말은 초등학생 중학생때 많이 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왜 그랬을까? 친구라는 걸 특수한 프레임으로 만들어 내 마음대로 주위  친한 아이들에게 씌웠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친하게 진해던 친구와 절교라는 말 없이 마치 절교한 듯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싫은 점이 있어도 절교의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끼리는 오히려,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씌운 그 특수한 프레임때문이다. 이는 관계가 특별해짐에 따라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가까워 진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주관속에서 상상하고 기대하던 관념적 이미지를 만들어 넣음에 따라 현실과 우리 관념속 이미지 사이에 괴리가 생겨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재밋는 사례를 하나 말해주겠다. 과 동기가 '여사친'에서 연인이 된 내 친구 이야기다. ( 여사친이란 사귀는 여자친구가 아닌 성별이 여자인 친구를 말하기 위해 쓰는 여자 사람 친구를 줄인 표현이다 )  '여사친'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을 때는 여자아이가 밤에 술자리를 가져도 연락만 되면 좋아했던 친구가, 여자친구가 되자 밤에 늦게 다니는 것부터 다른 남자가 포함된 술자리를 갖는 것까지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 결국에는 여자친구와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


  왜 그렇게 속앓이를 하냐고 물으면 사랑하니까 그런다고 한다. 너무 당연한 대답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대답이다. 만약 그 아이가  여자친구가 아니였으면 내 친구는 속앓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아이 역시 상처받고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가 여자친구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다면 그런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유를 물으면, 친구는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사귀었고 그렇기에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여자아이를 친구의 관념 속에 존재하던 사람으로 애써 맞춰 넣고자 했던 욕심 때문일. '너를 사랑하기에 너에게 집착한다' 는 너무나도 모순적이고 반대되는 말이다. 만약 사랑이 정말 관념 속 기대를 실현하도록 연인을 강제할 수 있는 권리라면, 우리가 알고있는 숭고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은 모두 거짓이며 위선이다.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와 붓다는 그저 위선자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5


 우리가 역사적으로 사랑을 숭고하고 고귀하게 여겼음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사례나 친구의 사례들을 보더라도 사랑이 숭고해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추잡스럽고 처량해보인다. 대체 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처럼 추잡스러워 보이는 욕망을 고귀하게 여겼을까?


 먼저, 위에서 얘기했던 이타심과 이기심에 대해 짚어보자. 사랑은 이기적인 것일까, 이타적인 것일까? 위에서 본 추잡스러워 보이는 사랑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 스스로가 중심이되어 멋대로 관념이 투영된 프레임을 정해 그 사람이 아파해도, 사랑하니까 그렇다고 하며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들을 도려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귀하게 여겨지는 사랑의 개념은 이타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나(Ego)와 너(You)의 개념이 있다. ('우리' 라는 것도 결국 나눠보면 '나' 와 '너'로 이루어져있다.) 숭고한 사랑은 나(Ego)를 완전히 녹이고, 나(Ego)를 완전히 녹인 사람들이 우리가 흔히 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모성애가 왜 그토록 고귀하게 여겨지는가. 그건 어머니는 그 어느때 보다 마음속에 자신(Ego)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식(You)을 채워넣기 때문아닌가.


* 물론 사랑이 먼저냐, 에고의 녹아내림이 먼저냐 라고 한다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해 대답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둘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과 같이 밀접한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관계에서 문제는 나(Ego)의 비대화로 인해 생긴다. 우리는 앞서 말한 현자가 아니기에 나(Ego)를 완전히 녹여 100%를 너(You)로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나(Ego)를 완전히 녹이지 못했고, 그렇기에 때때로 이기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걸 알고, 혹여 내가 나의 관념 속 프레임을 들이대지는 않는지 돌아볼 수 있다면, 보다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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