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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명 Sep 17. 2018

차였다면, 밝게 웃어보자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

대학교에 들어와, 막역하다 싶을 정도로 친하게 지낸 친구 녀석이 한 명 있다. 룸메이트로 우연히 만난 인연이 이렇게 까지 될 줄은 몰랐다. 휴학하고 난 지금도 그 녀석과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는데, 최근에 만났을 적에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 나도 이제 이제 연애 좀 해보고 싶다 "


학교 다닐 때 소개를 시켜 준다고 해도 괜찮다고, 준비가 안됬다고 피하기만 해서 김이 빠졌던 나는 내심 신이 났다. 하나 걱정되는 부분은 짧고 가벼운 연애 경험을 제외하고 대로 된 연애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물론 제대로 된 연애란 게 정해져 있진 않지만, 여기선 둘 중 한 명이라도 서로에게 감정을 어느 정도 공유한 연애로 말하고 싶다)


주변 친구들에게 의뢰하여 본격적으로 상대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직 연애경험이 없는 점, 이성에 대한 표현이 서툰 점 등을 고려해서 적합한 상대를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찾았다. 친구에게 연락을 취해 서로를 연결시켜주고, 이만하면 ' 잘 되겠지 ' 하며 한시름 놓고 있었다. 여자아이도 연애경험이 많지 않아, 둘 다 나쁜 친구들이 아니란 걸 알기에, 서로가 서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주 주말, 두 사람이 만난 다음날이었다. 친구 상태가 심상치 않다. 분명 어제 전화했을 때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밤에 다시 전화를 하니 말투에 가시가 돋쳐있다. 더 찔릴까 봐 전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후딱 끊었다.

'뭐지? 잘 안된 건가?' '그냥 안됬다고 저럴 리 없는데, 둘이 싸웠나? 에이, 초면인데 설마 그랬겠어.'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친구 녀석한테 '어색한' 메신저가 와있었다.


"모해" (뭐해?라는 뜻)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도 신경질 낸 게 내심 미안했나 보다. 전화해서 물어보니, 느낌이 차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자기는 이제 괜찮다고. 연애 같은 거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하며 어제 신경질 내서 미안하다고 한다. 친구 녀석의 말에 괜히 내가 더 미안해, 상투적인 위로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몇 마디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이 녀석은 분명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해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 번의 거절로 상처를 받은 채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2

내 친구의 이야기를 했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아픔일 것이다. 특히, 짝사랑을 했다가 좌절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술과 안주만 있다면,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가 손에 가시가 박혀 물러난 사람들, 그러고 나선 부정당하는 게 두려워 두드리는 시도 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 한없이 작아져있는 자기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왜 괴로워야 하는지 이제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대체로 그러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몇몇 사람에게 부정당할 수는 있지만, 그게 세상에게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다. 혹여 세상이 우릴 부정한다고 할 지라도 그게 과연 우리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일까?

왜 우린 타인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 할까? 사회적동물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사회적동물이라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타인이라고 칭하든, 이성이라고 칭하든, 세상이라고 칭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습 중 일부분을 보고 나머지 모습도 이러할 것이라고 유추한다. 다시 말해, 그렇게 우리의 이미지를 그들의 내면 속에서 '주관적'으로 만든다. (우리 역시 그렇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한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불리는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이 죽은 뒤에 후대에 정반대로 바뀌는 사례도 많다. (물론 그것도 그 사람에 대한 '완전한 평가'라고 하기 힘들다. 단지 정보가 조금 더 주어졌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주관 속에 형성되는 이미지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성관계를 살펴보면, 더욱 위에서 말한 '임의성'이 커진다. 상대방은 그날 하루의 나의 기분 혹은 감정, 얼굴이 부었는지와 같은 외모, 입은 옷 스타일, 최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등과 같은 요소들로 순간적인 나의 첫인상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너의 결혼식>에 나온 대사 중 하나로, 사람이 누군가에게 반하는 건 딱 3초라는 표현을 한다. 그게 처음 만난 순간이든, 오랜 이성 친구와 같이 밥을 먹는 순간이든지 간에 말이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우리가 원하는 이상형을 정해놓는다. 그러고는 그 3초가 오는 순간을 '기다린다' 내가 원하는 이상형 (다른 말로 하면, 프레임)에 맞는 3초를 찾았을 때, 끌린다고 표현한다.


또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우리 스스로는 매 순간 변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행동한다.

심장은 매 순간 뛰고, 두뇌는 생생하게 외부의 자극들을 해석하며 우리는 해석을 통해 생각과 행동이 변화해간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간에 말이다) 멋진 롤모델을 보고, 기존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감명깊게 읽은 책을 곱씹으며 기존의 틀을 깨고 나와 변화할 수도 있다. 혹은 이성교제를 하다가 크게 데여,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도 있다. 뿐만 아니라, 길가다가 본 작은 글귀를 보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조금이나마 변화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신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우리 조차,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않는 이상, (설령 그렇다 할 지라도) 스스로를 완전히 알기엔 어렵다.


3

3초든, 3시간이든, 3년이든,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이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극히 일부임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 일부마저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가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는 불완전한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혹은 사회적 평가를 위해, 나의 많은 모습 중에  '정제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의 구속이자 스스로의 행복을 갉아먹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밝게 웃는 게 가장 보기 좋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매우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평가에 의해 상처받고 그로 인해 웃음을 잃어가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최근 몇 년간 서점 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는 꾸준히 행복과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를 다루었다. 즉 '힐링'이 주축이 되는 서적들이었다. 현대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투성이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동물이고 실수투성이다. 혹여 내가 실수를 했고, 그로 인해 누군가 나를 깎아내리고 부정했다면 그때는 마음이 조금 아프고 불편할 수 있지만, 나의 극히 일부만 보고 하는 말임을 인지하자. 그리고 나선 이 또한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그 어느 것도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건 없음을 생각하자. 그리고는 한번 밝게 웃어보는 거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그럴 수 있다면, '행복 결핍'사회에서 보다 더 행복하고, 생동감 있는 순간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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