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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May 28. 2018

말러 9번을 듣다.

KBS교향악단, 지휘 요엘 레비의 말러 교향곡 제9번 D장조 

G. Mahler / Symphony No. 9 in D Major 



어째서 슬픔으로 향하는 길에 익살이 있는가? 죽음으로 가는 길에 힘이 있는가. 온 몸으로 활을 당기고 숨을 불어넣으며 죽음을 노래하는 일이 어째서 가능한가. 죽음을 말한다는 이 교향곡은 그러니까 모순이 아닌가.



공연 시작 직전 콘서트홀에 들어와 착석했을 때 나는 길을 잘못 든 대가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지휘봉이 막 휘둘러지기 직전, 모든 게 멎은 듯한 정적의 순간에 나는 공연히 울컥했다. 다음 순간 터져나올 음을 기다리며 모두가 숨죽였다. 어떤 존중과 기대감으로 뒤섞인 감정이 모여 있는 걸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선선히 자신이 갈 길을 우회하곤 한다는 이야기. 글을 쓰고 있다고 하면, 기대 이상으로 너그러이 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는 말. 사람들은 얼마나 이야기를 사랑하는지. 음악이라는 게, 없는 걸 함께 느끼는 일이, 얼마나 성스럽냐. 참, <밀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과 속. 두가지의 얽힘을 떠올렸다. 가장 더러운 것과 아름다움은 것을 얽어냈을 때의 아슬아슬한 힘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질문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요 며칠 자꾸만 생각하고 거듭 울게 되던 그 문장이 고개를 내밀더니 답('정념'을 보이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을 토하곤 내 속으로 다시 숨었다.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빚어지는 이야기와 감각에 와 닿는 유무형의 음과 빛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첫 음이 막 발하기 직전, 청중의 숨죽임은 그래서 뭉클했다.

1악장이 시작되고 예상치 못한 느낌을 받았다. 소리의 풍부함이야 예상한 바였지만, 차원이 다른 풍부함이 예상치 못한 정도로 감정을 끌어낼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었다. 나는 양껏 고양됐다. 앞서가는 관악기, 뒤따라 겹겹이 펼쳐지는 현악기의 음률이 섬세하면서도 힘차서, 공간 가득 펼쳐지는 힘이 놀라워서, 던져진 모티프들이 끊임이 없이 흐름을 타고 가는데, 그 모든 것이 전형적인 방식으로 이어지거나 반복되지 않는다는게 경이로워서, 감흥이 샘솟았다. 지루할 틈 없이 던져지는 조각들이 쌓여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시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하나의 큰 궤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목도하는 일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자꾸 새로웠다.달랐다.


2악장, 그리고 3악장의 재미는 특별했다. 위트가 넘쳤다. 2악장의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들뜬 현의 선율, 경쾌한 관악기의 소리를 따라가는데 그 볼륨감은 집에서 듣던 것에선 느낄 수 없는 류의 풍성함이었다.(그러나 집에 와서 정명훈의 말러 9번을 듣고 깨달았다. 실황을 듣기 전 유투브로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듣는 일과, 실황을 경험한 후 유투브로 연주를 접하는-복습하는-것은 완전히 다른 결의 일이라는 것을. 앞서 유투브로 들을 땐 눈치채지 못했던 맥락과 힘을 이번에는 느낄 수 있었다니까? 정말 꿈에 속기라도 한 것처럼) 2악장도 3악장도 그 시작이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3악장 도입의 그 번잡스럽고 힘찬 연주는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듣는 내내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휘몰아치듯 3악장이 끝나고 이어진 4악장은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아다지오. 4악장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밀고 오던 에너지를 조금 더 더듬거리며 짚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주 무거운 추를 느리게 굴리듯 선율이 이어지다 그 위로 바순이 느리게 등장하고, 다시 그 위를 현악기가 세례하듯 덮어내며 진행되는 부분에선 전율이 일었다. 커다란 동아줄을 밀고 당기듯 서로 다른 악기들이 소리를 내며 전체 구성을 빚어나가는, 구현되는 하나의 흐름이 경이로웠다. 여리게 이어지는 바이올린 연주를 따라 숨죽였다. 아주 여리게.

피아노를 배울 때 나는 피아니시모가 싫었다. 포르테가 좋았고, 그보단 포르티시모가 좋았다. 세게 건반을 두드리며 토해낼 수 있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오늘 들은 말러 9번 4악장의 연주에는 언젠가 내가 포르테를 경유해 토해내던 슬픔과 두려움까지도 담겨 있었다. 정념, 그리고 다시 정념. 소멸할 듯 잔잔하게, 가장 연약한 셈여림표의 지시에 따라 이어지는 선율이 결코 약하지도 여리지도 않아서 더 슬펐고 아름다웠다.




시간은 우리가 되고자 애쓰는 인간을 저버리며,
죽음은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른 인간을 드러내 보인다.


연주가 끝나고 자리를 떠나는 길에, 미셸 슈나이더가 글렌 굴드에 관해 쓴 책에서 본 문장을 떠올렸다. 농담처럼 떠난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언제나처럼 망연한 슬픔은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연주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울 때까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콘서트홀 바깥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었다. 밤 공기마저도 감상의 일부가 된 듯 했다.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소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것으로부터 나온 특별한 감흥만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신비한 수수께끼만 내 손에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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