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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Mar 03. 2018

세상에서 가장 느린 케이퍼 무비,
<로건 럭키>

브런치 무비패스 두 번째 이야기



멍청하다. 느리다. 허술하다.


<로건 럭키>를 보며 떠오른 형용사들은 죄다 케이퍼 무비엔 어울리지 않는 수식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 <오션스 일레븐>, <오션스 트웰브>, <오션스 써틴>까지 오션스 트릴로지를 흥행시킨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작품이 아닌가. 이쯤에서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일일이 지적하진 않겠지만 포스터에 박힌 설명은 대체로 틀렸다. <로건 럭키>는 범죄 오락 액션 영화가 아니다. 액션은 없다시피 하고 범죄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애초에 범죄에 뛰어드는 동기도 애매하다. 멋진 캐릭터? 그런 건 절대 기대하지 마라. 오션스 시리즈같이 박진감 넘치는 범죄 오락 영화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러닝타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텅 빈 팝콘통을 스크린에 집어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줄거리만 읽었을 때 이 영화는 케이퍼 무비의 전통을 성실히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장에서 쫓겨난 형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 분)이 한쪽 팔이 없는 바텐더 클라이드 로건(아담 드라이버 분), 감옥에 수감된 폭파 전문가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 분), 그의 쌍둥이 형제들과 함께 팀을 꾸려 레이싱 경기장 지하에 있는 금고를 터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것은 '케이퍼 무비'가 아니다"



<로건 럭키>는 한 편의 시니컬한 농담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에 "Ceci n'est pas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덧붙임으로써 이미지의 전복을 이끌어냈던 것처럼, 스티븐 소더버그는 가장 케이퍼 무비답지 않은 케이퍼 무비를 통해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아니꼽게 바라본다. 



1. 멍청하고


 <로건 럭키>의 인물들은 죄다 멍청하다. 얼이 반쯤 빠져 보이는 바텐더 클라이드 로건이나 인상을 찌푸리며 터덜터덜 걷는 지미 로건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폭파 전문가 조 뱅은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투덜거리기 바쁘다. 그의 억지로 작전에 참여하게 된 두 동생은 그야말로 '얼간이'라는 단어의 현신처럼 보인다. 웨스트 버지니아 토박이인 이 인물들은 느릿하게 움직이고 별다른 동기조차 없이 행동한다. 뱅 형제가 보여주는 얼빠진 행동들은 <오션스 일레븐>의 말로이 형제보다는 <덤 앤 더머>의 로이드와 해리의 것에 가깝다.


 인물들의 고향이자 이야기가 진행되는 배경인 웨스트 버지니아는 미 남부의 주로, 미국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낮은 주이자 트럼프를 당선시킨 지역이다. 영화는 웨스트 버지니아를 적극적으로 '써먹는데', 2014년 발생했던 식수 오염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석탄 공장에서 흘러나온 화학물질에 식수원이 오염되면서 상수도가 마비되어 모든 관공서 및 공공기관, 시설 등이 문을 닫은 사건은 극중 조 뱅이 탈옥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도움도 안 되고 주인공에게 피로감만 안겨주는 뱅 형제



 감독은 로건 형제로 대표되는 '멍청한 백인'들이 이끌어 나가는 허술한 소동극을 통해 트럼프를 당선시킨 현재의 미국 사회를 비웃는다. '위대한 미국'의 대표 운동인 미식축구를 하다 다리가 부러진 지미, 이라크에 파병을 나갔다 한 쪽 팔을 잃은 클라이드는 트럼프의 미국이 부르짖는 국가주의가 내포한 우스꽝스러움을 넌지시 암시한다. <로건 럭키>는 007, 매직 마이크, 스타워즈 등 미국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미국 남부에 소환한 다음 이들을 구기고 비트는 방식으로 유머를 구사한다. 스트립 댄서였던 <매직 마이크>의 채닝 테이텀은 다리를 절고, 스타워즈의 빌런은 왼팔을 잃은 우울한 바텐더가 됐다. 매력적인 007이었던 다니엘 크레이그는 어설프고 멋 없게 여성을 희롱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 느리고


 <로건 럭키>는 느리다.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 분)의 출소 장면에서 시작한 <오션스 일레븐>이 미스터 오션스를 필두로 한 막강한 도둑 군단 '팀 오션스'를 꾸리고 마침내 카지노를 털기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데 비해, <로건 럭키>는 무언가를 훔치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부녀의 스몰 토크에서 시작해 지지부진하게 나아간다. 다리를 저는 걸 숨기고 취업했던 지미 로건은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한 아내의 이사로 딸을 자주 못 볼 상황에까지 처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미 로건이 돈을 훔치는 이유는 아니다.


 영화는 평범해 보이는 지미 로건에게 돈을 훔칠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압박적 상황으로 인물을 몰아가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스릴은 소거된다. 상황은 다소 엉거주춤하게 조합된다. 와중에 느닷없이 삽입되는 레이서 데이튼(세바스찬 스탠 분)의 이야기는 전체 서사의 맥을 툭툭 끊는다. 전체 서사상 거대한 맥거핀으로 작용하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투닥거림은 영화의 '멍청한' 리듬에 한몫한다.



케이팝스타 나가서 애국가 제창하는 격



 영화 전반에 깔리는 컨트리 음악은 케이퍼 무비에서 기대할 만한 것과는 정반대의 리듬을 만든다. 이는 감독의 냉소적 시선을 충실히 견인한다. 극중 지미의 딸 새디(파라 맥켄지 분)는 출전한 경연대회(외모지상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 경향에 따른 어린이 미인대회-장기자랑 대회 정도로 보인다)에 출전해 리한나의 '엄브렐라'를 부르려다 말고 뜬금없이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부른다. 실제 웨스트 버지니아의 주가(州歌)인 이 노래를 뒤이어 모든 관객이 따라 부르는 기묘한 장면이 뒤이어 연출된다. (심지어 지미 로건은 눈물까지 훔친다.) 이 장면은 앞서 레이싱 대회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는 관객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로 얼룩진 두 장소에서 사람들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엄숙하게 노래를 제창하는 장면에서 미국 사회에 대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비웃음은 정점을 찍는다.



3. 허술하다


 이토록 허술한 계획으로 돈을 훔칠 수 있다니. 경탄이 절로 나올만큼 계획은 허술하다. 딱딱 떨어지는 액션도 없다. 쫓는 쪽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상한 연기가 난다는 제보를 받고 지하를 순찰하던 이들은 범인을 의심 없이 보내주고, FBI는 제 2의 맥거핀으로 보일 정도로 무능하다. 멍청이 대 멍청이의 대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는 멍청이들의 서사에는 통쾌함도, 시원함도 없다. 로건 형제는 훔친 돈의 일부만 가지고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원칙이라나) <로건 럭키>의 헐거운 소동극을 거치고 나서도 형제의 생활은 그대로다. 벼락부자가 되지도 않았고, 형편이 썩 나아진 것도 아니다. 클라이드의 허술한 의수가 새 것으로 바뀐 것 이외엔 변화 없는 그대로의 삶이 계속된다. 정작 금고가 털렸던 기업은 정산 시스템의 허술함을 악용해 몇 배의 보험금을 손에 넣는다. 미국이 굴러가는 원리이자 자본주의의 이치인 셈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통쾌함 대신 미심쩍음을 중심에 품은 영화 <로건 럭키>는 덜그럭거리며 삐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고수한다. 해서, 스티븐 소더버그의 썰캐즘(sarcasm)은 끝내 성공적으로 완결된다. 그러나 2시간 여의 남부식 농담과 늘어진 테이프 같은 리듬은 관객이 극복해 내야 할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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