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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Feb 26. 2018

체험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브런치 무비패스 첫 번째 이야기



어떤 영화는 영감을 주고, 어떤 영화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또 어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게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마지막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 카메라는 미끄러지듯 숲길을 따라간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시선 같다. 비켜나라는 듯 자전거 벨소리가 두어 번 울리면, 체크 남방을 팔랑거리며 자전거를 타는 혜원(김태리 분)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다. 카메라(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그녀를 뒤따른다. 혜원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면, 관객이 할 일은 단 하나다. 몸에 힘을 풀고 103분의 러닝타임을 유영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는 것.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소려한 풍경을 만끽하세요


<리틀 포레스트>는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 분)이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생활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인물을 뒤흔드는 특별한 사건도, 러브 스토리도 없다. 기껏해야 어릴 적 고향 친구인 재하(류준열 분)와 은숙(진기주 분) 사이의 분홍빛 무드 정도가 영화의 '사건'이다. 죽고 죽이고 미치는 영화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도희야>, <곡성>…. 그간 시골을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들이 죄다 범죄나 기현상을 서사의 중심에 두었던 것을 떠올릴 때, <리틀 포레스트>는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겨울에서 시작해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한 번의 겨울을 <리틀 포레스트>는 아름답게 담아낸다. 눈부신 풍광은 혜원의 눈을 거쳐 관객에게 당도한다. 임순례 감독의 카메라는 각 계절이 내뿜는 생동감과 공기의 느낌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닳아버린 '힐링'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소환하고 싶어질 만큼 영화가 주는 감각은 산뜻하고 소려하다.



맛의 힘, 기억의 힘


혜원은 엄마를 떠올린다. 어릴 적 엄마가 해준 음식을 직접 만들고, 먹는 과정에서 그녀는 어김없이 엄마와의 순간들을 소환한다. 맛에는 기억이 묻어 있다. 혜원은 때로는 혼자 먹으며 엄마와 함께 했던 순간을 곱씹고, 엄마가 자신을 위로하려 만들었던 '크렘 브륄레'를 친구 은숙에게 만들어 주며 새로운 추억을 빚어낸다. 극중에서 혜원의 엄마(문소리 분)는 과거 회상 장면에서만 등장하지만, 더없이 커다란 존재감을 자랑한다. 맛의 힘, 기억의 힘이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자매들이 어릴 적 아빠가 좋아했던 잔멸치덮밥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혜원과 엄마는 현재의 시간에 마주하지 못하지만 과거에 함께했던 맛과 풍경으로 연결되어 있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카메라가 담아내는 음식은 가본 풍경과 가보지 못한 풍경 모두를 소환하는 매개다. 나는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사천시 용현면의 할머니 댁을 떠올렸다. 비가 추적추적 왔던 날이었다. 달님, 지혜, 영민과 삼천포에서 회를 떠 먹고 작은 방 이불 속에 누워 따뜻한 온돌에 함께 등을 지졌던 기억. 온돌에게 '도리'라는 별칭을 지어주며 온갖 이야기를 떠들었던 그날 밤. 찐한 단맛을 내던 그 계절의 단감. 비를 잔뜩 맞고 돌아와 몸을 녹일 때, 그 방의 공기가 얼마나 다정했는지를 떠올렸다. 놀라운 일이다. 어떤 맛 때문에, 어떤 공기 때문에, 기억 때문에 어떤 존재들을 영영 잊을 수 없게 된다는 건. 함께 먹는 일은 그래서 무섭고 소중한 일이다.



위협 없는 판타지적 공간


영화 초반, 바깥에서 들려오는 여자 울음소리 같은 짐승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혜원을 보며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시골살이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여성이 혼자 농촌 생활을 하는 이야기에서 관객이 느낄 필연적인 불안감을 적절한 예방주사로 둔화시킨다. 혜원이 돌아온 곳이 그녀에게 익숙한 고향이라는 점, 그녀에게 호의적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친구 재하가 근처에 산다는 점(쓰고 보니 이 지점은 실질적인 성범죄 가해자의 3분의 2가 피해자의 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를 안심시키지 못했다)은 여성 관객들이 느끼는 불안을 완충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실재하는 갈등과 불안에서 짐짓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린다. 유해한 남성 어른을 스크린에서 거세하고, '시험은 어떻게 됐니' '남자친구는 있니' 하는 여성 어른들의 오지랖 정도만을 남겨두는 식이다. 완벽히 계산되고 직조된 판타지적 '시골'인 셈이다. 판타지의 공간 안에서 혜원은 안락하게 먹고, 마시고, 기억하며 성장해 나간다.


<리틀 포레스트>의 세계에는 창조만 있다. 아무것도 소멸되지 않는다.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은행 빚이나 가뭄으로 인한 농민들의 우울도 없다. 그야말로 엔트로피를 무시하는 에너지의 세계다. 음식을 만들고 먹지만 설거지는 하지 않고, 당연히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장면도 없다. 끝 대신 새로운 시작이 있다. 현실에서 겪는 대개의 경우와는 다르다. 폭풍이 사과와 벼를 쓸어도 괜찮다. 배운 셈 치면 된다. 사과 중엔 살아남은 것이 있어 위안을 주고, 벼는 묶으면 얼추 되살아난다. 그 세계엔 자꾸만 다음이 있다. 아무도 절망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도피하고 쉬어갈 수 있는 꿈 같은 곳. 재미있는 점은 이게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위안이 된다는 데 있다. 영화 <패딩턴>이 아무렇지도 않게 런던에 등장한 곰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처럼,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세계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관객을 위무한다. 미래 시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세계는 일말의 실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 나가는 것, 낙관에 대한 힌트를 쥐어준다.어떠한 사태 내에 있을 땐 다음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다음이 있다는 것. 다음 해에도 사과 농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고 싶게 만든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자연'과 '요리'와 '나'는 엄마의 작은 숲이었다.
나도 나의 작은 숲을 찾아야지


혜원은 자신을 떠난 엄마를 생각하며 '나의 작은 숲'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일찍 숨을 거둔 남편, 시골에서 홀로 딸을 키워야 하는 상황.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인 삶에서 '작은 숲'은 작은 위안이며, 동시에 삶 전반을 지탱하는 힘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숲은 영화관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다니. 때로는 영감을 주고,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이 곳이야말로 나의 작은 숲이야. 이 아름다운 가짜들. 거짓말들.


아름답고 어두운 나의 작은 숲.






1. 큰 상영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화면에 담기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2. 시골살이의 어려움에 궁금증이 생기신 분들께 아토포스 출판사의 책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를 추천합니다.

3. 보는 즐거움이 넘치는 영화입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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