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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May 24. 2018

상상력 없는 세계, 영화 <소공녀>

"나는 구겨지지 않을 거야"

다음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에서 주인공 조조는 존엄을 지키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구겨지지 않고 좋은 집안에서 양껏 사랑받으면서 자랐을 '나'의 다른 버전을 생각한 다음, 그것이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다. 원래 되었어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바깥의 것들이 자신을 구기지 못하도록 애를 쓴다.



프랜시스 호지스 버넷의 작품 <소공녀>(A little princess)의 주인공 새라 역시 상상의 힘에 기대 힘든 순간을 버텨낸다. 좁은 다락방에서 머물며 하녀로 살아가면서도 새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공주라고 상상한다. 극도의 허기에 시달리다 동전을 주웠을 때에도, 스스로를 공주라 여기며 동전으로 산 빵을 거지 소녀에게 준다. 그리고 상상의 힘은 새라를 공주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안온함과 부유함은 상상의 힘을 믿은 소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소설 <소공녀>의 세계에서 상상력은 유효한 힘이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Microhabitat)는 상상이라는 관념론적 기반에 빚지지 않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도래할 미래를 기대하지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나에 기대지도 않는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고, 스스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련할 뿐이다. 그녀는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를 사랑한다. 원하는 걸 알고 그것을 행한다는 간단한 법칙이 미소라는 인물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효하다. 그녀의 삶에는 상상은 물론이거니와 약속도 잘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약하며 현재의 결핍을 감수하는 일이 그녀에겐 낯설다.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이 돈을 벌어오겠다며 타국으로 떠날 때 그녀가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건 그의 약속이 그녀의 세계에선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상상에 빚지며 산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전고운 감독의 2018년형 <소공녀>보단 프랜시스 호지스 버넷의 1905년식 <소공녀>에 가깝다. 유물론적 토대 없는 삶을 믿지 않으면서도 관념의 힘을 과하게 믿는다. 나는 아직 도래할 미래가 기대되고 아직 되지 못한 내가 너무 많이 남은 것만 같다. 그러나 올해, 그리고 올해 이후까지 오래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2018년식 소공녀 미소의 유물론적 태도와 1905년식 소공녀 새라의 관념적 태도를 모두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필요한 만큼의 노동을 해나가면서도, 언제가 도래할-내가 약속했으므로 반드시 내 앞에 도래할-저 너머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 것. 그 균형이 끝내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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