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배우다(4)
덜덜덜. 애드리절트에서 진행한 개원의 대상 마케팅 세미나. 병원광고 관련 의료법 강의를 맡은 직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연신 립밤을 발라댄다. 처음 해보는 세미나 발표라 떨리는 게 당연. 나를 보더니 기를 넣어주란다.
긴장하고 있으니 잘할 거야.
직원은 떨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잘 해내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줬더니 다음번에는 긴장 안 하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란다. 한마디 해줬다.
“안 돼, 안 돼~ 다음번에도 긴장하고 해야지!”
유퀴즈에서 유재석이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묻는다.
“조성진 씨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도 공연 중에 긴장되고 떨립니까?”
“아, 매번 떨리죠.”
“진짜 그래요?
“네, 너무 당연하게.”
조성진의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고백이 그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만큼이나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거장도 긴장을 하는구나. 어디 조성진뿐이겠는가.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는 스타트대에 들어서기 전 춤을 추었다. 시합을 앞두고 불안한 생각과 긴장을 잠재우기 위한 몸짓이었다고 한다. 이미 금메달을 몇 개나 쥐고 있어도 매 경기마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수없이 듣게 되는 운동선수들의 멘탈 관리 방법, 이미지 트레이닝 등은 그들이 프로임에도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물론, 너무 긴장하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신입사원들에게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 새로운 회사에서의 일을 막 시작한 그들은 경험 미숙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사소한 실수들을 한다. 하지만 회사를 곤경에 빠뜨리는 진짜 문제는 대게 너무 긴장하지 않아 생기는 실수에서 비롯된다. 이런 실수는 나태함으로 해석되기에 고객사가 우리 회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덜덜 떠는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초보운전자가 사고 내봐야 접촉사고다. 대형 사고는 운전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주의가 산만해진 운전자에게서 비롯된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게 요청한다. 긴장을 없애지 말자. 다만, 긴장에 익숙해지자.
내가 교사 시절 만났던 어떤 제자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 적절히 긴장을 활용했다. 그 학생과의 상담 중 내신 시험을 대비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그 학생은 시험 4주 전부터 시험 시간표에 맞춰 학습 계획을 짜고 공부에 몰입했다. 그런데 다소 독특한 점이 있었다. 시험 전날까지 어떤 과목이든 100% 완벽하게 학습을 끝내지 않고 2%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100% 끝냈다고 생각하면 긴장이 풀려 그 과목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 2%를 남겨둬야 긴장감을 유지해 학습한 98%를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은 2%는 시험 전날 몰입해서 채워 넣는다. 이런 방법으로 이 학생은 3년 동안 최우수 성적을 보여줬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중에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심리효과를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심리학자 자이가르닉이 식당에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터를 관찰하던 그녀는 수많은 손님들로부터 주문을 받는 웨이터들은 어떻게 저렇게 헷갈리지도 않을까 신기해했다. 자신의 음식을 가져다준 웨이터에게 조금 전 옆 테이블에 갖다 놓은 메뉴가 뭐였는지 물었다. 그런데 웨이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당황해하는 것이 아닌가.
자이가르닉은 몇 번의 실험을 거쳐 하나의 원칙에 도달했다. 인간은 완결 지은 문제보다 완결되지 않은 문제를 더 잘 기억해 낸다는 것. 완결되지 않은 문제는 기억회로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회로에서 떨쳐내지 못한다는 건 계속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 생각한다. 웨이터가 그랬듯 과업이 끝나면 긴장도 풀리면서 기억회로에서 깨끗이 사라진다.
내가 만났던 학생이 자이가르닉 효과를 알고 학습 계획에 적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외워둔 내용들을 시험 볼 때까지 확실하게 움켜쥐기 위해 2% 남겨두는 방법은 심리학에서도 검증된 기법이었던 것. 그 학생은 이런 공부법으로 끝까지 긴장했고 더 잘 기억해 냈다.
나 역시 회사를 경영할 때 긴장하지 않음을 무엇보다 경계한다. 최고의 퍼포먼스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말한다. 긴장감에 적응이 됐다고.
거장도 긴장을 한다.
당신이 떨고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거다. 파이팅!
*배경이미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