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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Jeong Dec 14. 2018

6편:: 들어는 봤나, 모닝가출


별 일 없을 것 같은 하루가 또 시작된다




벌써 다섯 번째 날. 아니 뭘 했다고?
애기 분유 사고, 오토바이 비용 바가지 맞고, 한 일은 그 두 개뿐인 것 같은데?
낯선 곳에서의 시간은 집에서 아기를 볼 때 보다 몇 배는 더 빨리 간다.
다행히 닷새 사이 많은 것이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
눈 앞이 깜깜했던 첫날과는 달리 이제 아기의 생활 루틴도 얼추 감을 잡았고 엄마아빠와 나도 서로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린 다 함께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이 먼저 아침산책을 다녀오면 그 후엔 아기를 잠시 맡겨두고 내가 잠시 동네 한 바퀴를 한다던지, 뭐 그런 방식으로.
엄마아빠에겐 처음인 발리, 나에겐 두 번째 발리를 서로 원하는 방식으로 누리고 갈 방법으론 이게 최선이었다.
혹여나 아기와 여행을 가게 된다면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남편에게 아기를,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혼자만 오롯이 동네를 누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 좋은 아침일세~



어른을 위한 망고, 아기를 위한 바나나




전 날 엄마가 마트에서 사둔 과일을 먹으며 일찌감치 산책을 나간 엄마와 아빠를 기다린다.
동이 틀 때의 더블식스 비치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더블식스는 서쪽에 있다 보니 해지는 모습이 더 멋질 텐데, 서쪽 바다에서 보는 해 뜨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기랑 함께 나가볼까 싶다가도 이내 귀찮아 시원한 타일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시간도 많은데 나중에 가보면 되지 뭐.
엄마 아빠는 아침밥을 먹을 때쯤 돌아왔다. 양손엔 각각 오 리터짜리 생수통을 들고서.
엄마는 그 사이 생수가 싼 마트를 찾아놨다.
집 앞이라 거리도 멀지 않아 오며 가며 한 통씩 사다 두면 좋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발리의 물은 석회질이 많다 보니 아기 젖병을 삶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나서도 하얀 분이 남는다. 그래서 생각보다 생수가 많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석수 같은 큰 생수통은 이고 지고 오기 힘들고 사용하기도 힘드니, 오 리터짜리 생수를 생각날 때마다 사 오는 편이 나았다.









들어는 봤나, 애니의 모닝가출



간단히 아침밥을 먹고 이번엔 내가 집을 나섰다.
이때가 오전 8시 반쯤.
보통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늦잠을 잔다거나, 바스락거리는 호텔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지만 나와 여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이 시간 즈음 내가 사라진다는 걸 안다. 이름하야 #애니의모닝가출!
생각해보면 애니의 모닝 가출은 이미 신혼여행 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 같다.
신혼여행에 와서 왜 혼자 다니려고 하냐는 남편에게 혼자 좀 구경할 수도 있지, 아침밥 먹는 데에서 만나~하고 거닐었던 세이셸의 빌라단지에서, 아마 그때부터 모닝 가출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둘이 함께 누리는 아침의 풍경도 좋지만 누군가의 단잠을 빼앗아가면서까지 함께하자고 강요하기도 싫었을뿐더러 아침의 고요함만은 독차지하고 싶었다.
또 밤에 혼자 걷는 것보단 대낮에 걷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부로는 일등 못하니 몸이라도 부지런해서 이런 걸로라도 성취감을 얻고 싶었던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점이 온 내 마음(?)때문에 언젠가부터 여행지에서의 모닝 가출은 필수코스가 됐다







바닷가가 아니라 큰길을 따라 걸어본다.
오늘은 정처 없이 걷기보단 목적지를 두고 걷기로 했다.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어 리볼버 에스프레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리볼버 에스프레소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남짓. 걷기엔 애매한 거리지만 땀 쫙 빼고 아이스 롱 블랙을 마시는 그 기분을 상상하며 걸어본다.
예전에 개그맨 김준현이 한 방송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팁을 알려준 적이 있다.
밤을 새우고 돌아오는 길, 꽉 막힌 차와 더위로 가득한 길에서 맥주가 생각나면 그때부터 물과 갈증을 참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약간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다음(와 근데 여기서 참을성 인정. 난 이미 집에 오자마자 맥주캔 땄다...) 바로 선풍기를 미풍으로 켠 뒤 오른손에 광어 초밥 한 점 들고 맥주를 마시면 ‘쭈욱’ 넘어간다고. 세상 그 무엇의 행복과도 바꿀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던 그의 얼굴을 보며 ‘아 나도 알 지알지, 그 느낌 알 지알지~’ 싶더라.
오늘의 커피도 그런 기분으로 마셔보기로 한다.







아침에 걷는 밤의 거리는 참 색다르다.
푸껫의 빠통 거리가 그랬고, 스미냑의 거리가 그랬다.
밤의 모습을 본 후 다시 밝은 대낮에 그 길을 마주칠 때면 내가 다 낯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화려한 화장을 지우고 초라한 그 맨얼굴이 들킨 사람처럼.
그럼에도 그 사이엔 동틀 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미냑 또한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대체로 아침을 파는 브런치 카페나 카페들이지만 그 사이에는 그들을 위한 아침밥을 파는 와룽과 박소, 나시를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들도 함께한다. 이들이 아침을 만들고 떠난 자리엔 다시 누군가가 밤을 채우기 위해 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사람이 빌 틈 없는 이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은 누굴까.








그 사이 도착한 리볼버 에스프레소.
여긴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그득하다!
바뀐 점이라면, 그땐 오로지 커피만 마시고 가던 싱글들이 많았다면 오늘은 아기와 함께 브런치를 즐기러 온 가족 단위가 많다는 점? 앉을자리가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직원이 내부 인원을 체크해보더니 친절히 입구 앞의 자리로 안내해 준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챙겨 입고 와 핸드폰 케이스에 꼬깃꼬깃 넣어둔 십만 루피아를 꺼냈다.
대부분의 커피값이 삼만 루피아 이상인데 여기에 택스랑 뭐랑 붙이면 한국 커피값이랑 비슷하다.
언제 물가가 이렇게 오른 거야 이 동네는...!
아이스 롱 블랙을 마시려다가 ‘킬러 칠러’라는 이름의 커피가 있길래 그걸 마시기로 했다. 이름이 너무 힙하잖아!
정말 죽여주게 시원할 것 같은데!



라고 했지만 내 입맛엔 하나도 안 맞는 커피였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후회를 한다더니, 오늘 딱 내 모양새가 그렇다.



킬러 칠러... 안녕 넌 좋은 커피였지만 다시 만나지 말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만난 작은 카페. 한 번을 못가고 결국 한국에 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기는 이미 아침 낮잠에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오래 가출을 해볼 걸.



#발리한달살기 #아기와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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