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와 빈(Wein)의 따뜻한 사람들
밤새 내린 눈은 아침까지 이어져 프라하를 하얗게 물들였다. 차갑게 언 손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갑을 몇 번이고 벗어가면서 눈 내린 프라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프라하 중앙역까지 걷는 동안의 추위가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도시마다 기차역에 들르는 것이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객이었기에 그 속에서 동질감과 알 수 없는 소속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기차역에는 작은 베이커리와 카페들이 많았고, 사람들 틈에 줄을 서 빵과 커피를 사 먹는 아주 사소한 일이 내게는 여행의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눈은 아름답다. 펑펑 내리는 눈은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속이 시원하다. 나는 여우비나 진눈깨비보다는 굵은 빗줄기와 함박눈을 좋아한다.
눈은 내리고 나면 더럽다는 말이 있다. 내리는 순간은 참 아름다운데 쌓이고 난 뒤에는 회색깔로 변해 지저분해진다. 사실 더러운 건 눈이 아니라 도시의 먼지와 오물인데도 우리는 쉽게 눈이 더럽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미리 좌석을 예매했기 때문에 내 좌석에 출발지부터 도착지까지가 표기되어 있었다. 기차로 네 시간 정도면 오스트리아 빈 중앙역에 도착한다. 이번 여행의 주요한 일정들은 모두 빈에 예정되어 있었다.
신선한 햄과 치즈가 들어간 크로와상 샌드위치에 고소한 라떼를 음미하며 눈 내리는 프라하에 작별을 고했다.
빈 중앙역에 도착한 뒤 물품보관함에 무거운 가방을 욱여넣고 밖으로 향했다. 건물 사이 커다란 도로변을 거니는데 날카로운 칼바람으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가 벨베데레 궁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 아래 벨베데레 궁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유럽에 와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다른 표현을 써보고자 해도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한국인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중 한 중년 커플이 한눈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해 왔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름 애써서 몇 컷을 찍은 뒤 휴대폰을 돌려주자 여성 분이 내게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내게 무언가 더 말을 붙이고 싶은 듯했다.
그런데 그때 비정기적으로 한 번씩 등장하는 나의 못된 성미가 튀어나왔다. 이국 땅에서 만난 한국인이 반가워 그런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그녀의 대화 요청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선의도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무례하진 않지만 친절하지도 않은 말투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내게 이번 여행은 걱정스럽고 골치 아픈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 순간 '한국스러움'은 내게 '지루한 현실'과 동의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전형적인 한국식 패키지여행을 온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 껴있는 것에 어쩐지 심술이 났다.
못됐고, 못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내게 '너는 순하긴 한데 착하지는 않다'라고 말하곤 했다. 맞다. 나는 겁도 많고 여리지만, 착하지는 않다.
괜히 발걸음을 빨리하며 궁전의 앞으로 가자 예상치 못한 많은 인파들이 모여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듯했는데, 마침 배가 고팠던 나는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서는데 파는 음료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망설이던 끝에 바로 앞의 (아마도 현지인인 듯 한) 나이 지긋한 부부에게 "실례합니다. 따뜻한 와인을 파는 곳이 맞나요?" 하고 물었다.
그들은 서툰 영어로 몹시 친절하게 내게 답해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핫도그와 따뜻한 와인을 한 잔 주문하고 돌아가는데 가게 점원이 다급하게 "레이디!"하고 외치며 내가 깜빡한 거스름돈을 챙겨 주었다.
모두들 친절했다. 조금 전의 나와는 다르게.
커다란 바게트 속에 육즙 가득한 소시지는 제법 맛있었고 귀여운 크리스마스 컵에 든 와인은 무척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