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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rtonfink Dec 28. 2016

스모크(Smoke), 1995

왠지 크리스마스에 더 어울리는 영화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대로변에 일렬로 늘어선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피해 걷다가 그 냄새도 자국도 희미해질 때면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게 느껴진다. 해가 지날수록 길거리에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는 가을 풍경을 감상할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약간 때 이른 겨울을 탓하는 건 아니다. 뭐 나름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필자에게 겨울의 이미지는 춥지만 따뜻하기도 한 양가적인 성질을 지닌 계절이다. 다들 코끝이 시큰해질 무렵 사소하지만 홀로 슬며시 꺼내보는 겨울의 추억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추운 날씨에 즉흥적으로 가끔 사 먹고 싶은 호빵처럼 말이다. 다른 계절은 이런 양면성이 피부로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겨울을 조금은 편애하는 것 같다. 연말 특유의 시원섭섭하지만 설레는 분위기 또한 찬 공기를 부유하며 거리의 사람들을 휘감는다. 일 년 중에 일상이 가장 특별해지는 듯한 요즘, 어떤 기억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까. 기분 좋은 일이든 기분 나쁜 일이든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면 뭐 어쩌겠는가. 그때의 공기를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채우게 될 테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일들이 담배연기처럼 뿌옇게 떠올랐다가 또다시 금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기대감이 더 큰 요즘, 사람들은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듯하다.

  일상에서 스치며 지나가는 겨울의 장면을 볼 때면 한 영화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소개할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이 모순적이게도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말이다. 무슨 말이 그렇단 말인가. 바로 웨인 왕 감독의 1995년작인 '스모크'(SMOKE)다. 알려진 대로 '스모크'는 폴 오스터의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스모크'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담배가게를 운영하는 오기를 중심축으로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엮은 일련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럼 1990년 브루클린의 여름 해가 쨍쨍한 오기의 담배가게로 가보자.



1. 오기란 남자에 관하여


계산대에서 돈만 만지는 사람은 아니군.


  의 인용은 오기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대사다. 어느 날 저녁, 오기는 가게 셔터를 내리다가 급하게 담배를 사러 온 이웃 주민인 소설가 폴 벤자민의 부탁을 여유로이 응대해준다. 폴이 담배를 사러 카운터로 가자 눈에 띄는 물건을 발견하는데, 바로 필름 카메라다. 담배가게 주인이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지는 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폴은 오기에게 누가 카메라를 두고 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기는 태연하게 자신의 기록물을 보여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수 천장의 사진들. 그저 놀랍고 이해되지 않는 이런 기록이 폴은 믿기지 않는 듯 앨범을 계속 넘겨본다. 자잘한 그러나 위대한 것들이다. 이 비슷한 일상의 기록에서의 변수는 날씨와 우리네 삶의 풍경이다. 폴은 몇 장을 더 넘겨보다가 놀랍게도 자신의 아내인 알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견한다. 하지만 오기의 사진에 찍힌 이후 알렌은 안타깝게도 괴한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한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의 모습을 생각지도 않았던 제삼자의 기록을 통해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분명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또 그 당시 누군가에겐 이해되지 않았을 일상적 행동이 매우 소중한 기록으로 변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기란 남자. 계산대에서 돈만 만지는 부류의 사람은 확실히 아닌 듯하다.



2. 이름을 많이 가진 소년. 라쉬드 콜 혹은 토마스 제퍼슨 콜 혹은 폴 벤자민


  상을 살다 보면 낯선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설문 조사원이 유기명으로 설문을 부탁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설문에 응답하는 건 상관없는데 왠지 본명을 쓰는 건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다르게 쓰고 싶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흑인 소년이 폴을 어떤 위험에서 구해주고 자신을 라쉬드 콜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말이다. 이 흑인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적당히 능청스럽고 나름대로 예의도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조금 불안해 보인다. 목이 다 늘어난 싸구려 티셔츠를 입고 폴에게 자신의 개인 회계사가 이러쿵저러쿵 운운할 때부터 뭔가 감추는 게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라쉬드의 이모에 의해 폴은 라쉬드 콜이 사실은 토마스 제퍼슨 콜이라는 걸 알게 된다. 더구나 토마스가 어릴 때 헤어진 생부의 행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가출한 것도 알게 된다. 차후에 토마스가 매우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음에도 자신을 여전히 폴 벤자민으로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이 소년이 그동안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단절된 시간의 간극 때문에 진실을 섣불리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아버지란 낯선 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일단 제삼자를 자처하는 게 편리하니까 말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사회라는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카멜레온처럼 자신만의 보호색을 가진 아이가 관성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통성명을 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점이라 본다면, 그 입구부터 솔직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존재 기반이 미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오기와 폴에 의해 결국 서로가 부자 관계인 게 드러나게 되므로 토마스 제퍼슨 콜이란 이름만이 진정으로 필요한 곳을 찾게 된다. 소년에겐 진짜 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토마스가 세상에 대해 들통날 거짓말을 계속했던 건 심성이 나빠서라기 보다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를 스스로 만들어 왔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더 이상은 어린 친구가 가명을 쓸 필요가 없길 바란다. 



3. 18년 만에 오기를 찾아온 여자


  느닷없이 옛 애인을 18년 만에 만난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 인생의 나이테가 겹겹이 쌓이더라도 상상해보면 다른 감정보다도 놀라움일 것 같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하는 식의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도 뒤따라 들 것 같다. 어느 날 오기의 가게에 루비라는 이름을 가진 옛 애인이 찾아온다. 무려 18년 만의 재회다. 어떤 이유에서건 모든 관계가 정리되고도 남았을 충분한 시간이고, 심지어 루비는 그저 더께가 두껍게 내려앉아 희미해져 버린 기억 속의 존재였을 것이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어 온 걸까. 루비는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사실 둘 사이에서 난 딸이 있었단다. 그리고 그 딸이 마구잡이로 살다가 형편없는 또래 남자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딸이 있으니 아빠로서 혹은 할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달라고 오기를 찾아온 것이다. 인생이 각자에게 닥친 크고 작은 사건을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고 본다면 부모의 진가는 자식에게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혈육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 그동안 남처럼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존재가 딸이라고 눈앞에 나타났을 때 오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딸의 허름한 거처에서 유산소식을 남에게 얘기하듯 그렇게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버지로서 의미 있게 살았을 수도 있는 시간이 자기도 모르게 지나갔고 그 자리에 딸의 증오만이 남았을 때, 그 사실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18년 만에 왜 이런 관계가 오기의 삶에 들어와야 했을까.



4. 오기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흡연을 하는 보통의 성인들은 시가렛 타임이라 불리는 상황에서 특정한 의사소통을 한다. 꼭 특별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비밀 이야기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담배연기에 휩싸인 채 나누는 대화는 평소보다 조금 더 사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담배를 피울 때 더욱 괜찮게 들리는 이야기가 있다면 오기의 이야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 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뉴욕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작가 폴은 부업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할 때도 있는데 마침 신문사에서 성탄절에 실을만한 실화를 의뢰받은 상황이다. 하지만 마감이 4일 밖에 안 남았음에도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폴에게 점심을 얻어먹은 대가로 오기는 자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폴이 딱해 보였나 보다. 앞서 오기의 취미가 사진 찍기라고 한 바 있다. 오기가 들려줄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1976년, 청년 오기가 어느 담배가게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가게 물건을 훔친 좀도둑을 쫓다가 그가 흘린 지갑을 줍고 보관했던 적이 있었다. 훔친 물건과 별개로 지갑은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계속 미루다가 별 계획이 없는 성탄절이 돼서야 지갑 속 신분증에 적힌 주소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 좀도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장님인 할머니만 있었다. 할머니는 오기를 좀도둑인 손자로 착각하고 환대해주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오기는 그만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손자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할머니도 어느 순간엔 손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다가 오기가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새 카메라를 발견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욕심이 난 오기는 결국 카메라를 들고 나오기로 결심했고 그 대가로 지갑을 두고 나왔다. 그렇게 찍어댔던 카메라가 사실 훔친 장물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의로 지갑을 돌려주려 했던 본래 취지와 달리 일종의 교환이 돼버려서 인지 오기는 마음속에서 켕기는 기분을 떨치려 두 달 만에 다시 카메라를 돌려주려 그 집에 갔으나 이번엔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가 이사를 갔는지 돌아가셨는지 모르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오기가 카메라의 유일한 주인으로 남은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의 특별한 경험이 긴 여운으로 남은 탓인지 오기는 긴 세월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마음의 부채감이 그런 작품을 탄생하게 했다면 자의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빚을 갚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만하면 담배를 피우면서 하는 이야기치곤 꽤 괜찮은 이야기지 않는가?




The most precious things are lighter than air.


  영화 초반부에서 폴은 오기에게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는 방법에 대한 옛날의 일화를 소개한다. 사실 공기의 무게를 잰다는 건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폴은 저울과 담배 한 개비로 연기의 무게를 쟀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단하게 말해서 안 피운 담배의 무게에서 다 피운 담배와 재의 무게를 빼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 차이가 바로 담배 연기의 무게라고. 
  감독 웨인 왕은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담배연기와 같다고 본 것 같다. 일상이나 담배연기는 마치 공기처럼 가벼워서 어디든지 스며 들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잘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작은 일상들이 모여 우리의 삶이 무게를 가지는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은 공기보다 가볍다"라는 의미는 사실상 일상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의도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생각해보면 평상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이 가지는 의미를 그 순간에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타인의 삶은 조금만 지켜봐도 뭐가 좋게 보이고 안 좋게 보이는지를 잘 알지 않는가. 한 해 동안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면 그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 되면 누구나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타인의 삶에도 눈길을 주는 것 같다. 연말 분위기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연말은 마치 다 피운 담배와 털어낸 재와 같아서 연기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같은 때 우리가 한 해 동안 일상을 어떻게 채웠는지 생각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새 담배를 잘 피워보자고 제안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스모크를 본 사람들한테만 통할 비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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