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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T 31회 차가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분화구.
자욱한 구름에 가려 안 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산처럼.
꽉 차 있던 흉곽의 긴장이 빠져나가자 나의 흉골 정중앙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커먼 분화구.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게워내고, 풀어내며 모든 것을 용서하였음에도 이렇게나 묵직하게 검은 분화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이제야 나에게 드러내는 나의 몸이, 한편으로는 지독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여웠다.
오랜 상담을 통해 정서적으로는 충분한 정리가 되었기 때문인지. 꽁꽁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마음속 분화구에는 더 이상 용암이 솟구치지도, 차가운 호숫물이 가득 차있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관광지가, 누군가에게는 깊이 연구할 거리가 되기도 하는.. 개인의 사적인 슬픔과 분노, 한의 정서는 이미 이곳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다행히도 새롭게 발견된 지역 치고는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분화구에는 다 타고 남은 검은 재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기와 함께 잊혔던 냄새, 기억, 감각, 상황들이 내 마음속에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유아기에 불안정 애착을 형성했더라도, 성인이 되어 의미 있는 타인을 통해 교정적 관계 체험을 하여 내면의 벗(자기 챙김과 자기 관찰)을 갖게 된다면 누구나 안정 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 다만, 유아기는 신경계가 아직 성장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큰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받아온 경우에는 신경계가 약해질 수 있고, 그렇게 약해진 신경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큰 스트레스의 상황에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로 인한 신경 손상이 다른 사람보다 클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성장기에는 불안정 애착을 형성했었지만, 지난한 시간을 통해 획득한 안정 애착을 누리고 있는,
성인이 된 나는 마음의 탄내를 견뎌내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와 함께 차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더욱 확실해졌고 명확했다.
그 당시, 어렸던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잘못으로 얻은 상처가 아님에도 나는 한평생 숨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왔다.
알게 되었다. 는 것과 체득했다. 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피해자는 숨길 것이 없으며 용서와 비움을 통해 얻게 되는 귀한 자유를 편히 누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아직 체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여전히 숨겨야 할 것 같았다.
"기본만 지키면 돼.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냥 흘려보내는 거야."
"몸과 마음은 하나기 때문에, 몸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면 마음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거야."
귀신같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명의이자 이제는 나의 스승님이 된 그분이
CST 치료를 하다가 나지막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셨다.
두개골의 머리뼈를 구성하는 22개의 조각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해야 할 움직임을 잘 수행하고, 경추에서부터 천골까지 이어지는 촘촘하게 엮인 뼈들이 제자리에서 고유의 곡선을 유지해주는 것. 오래된 긴장으로 몸 안쪽으로 파묻혀 버린 빗장뼈와 후두 쪽으로 돌아가서 후두 신경을 압박하고 있는 흉쇄유돌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렇게 되면 접형골은 나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될 것이고, 뇌하수체에서 출발한 척수는 이어진 길들을 따라서 흐르며 마음껏 순환하겠지.
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 줄 때에 나의 자율신경계는 안정될 것이고.
신체 조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주신경이 드디어 제자리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던, 그저 흘려보내면 돼.
내가 집중할 것은 내 몸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체득되는 적절한 이완과 그라운딩, 깊어지고 느려지는 호흡에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변화무쌍한 세상사로 인해 끊임없이 자극되는 나의 신경계를 나 스스로가 다스리고, 안정시키며 조율해나가는 감각을 키워내는 것.
치료의 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컨트롤로지와 균형 감각.
그런 치유의 결과로 얻게 되는 자신감과 안정감.
이런 귀한 시간과 인연이 내 생에서 한번 더 주어졌음에.. 감사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