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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흡, 느려진 순간

100-4

by seulsim

호흡이 길고 느려지면서, 무언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잠시 흐르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 실없는 소리라도 한마디 던지던 나였는데, 요즘은 그 침묵에 한참 머무르게 되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의 이야기에 형식적인 공감을 해주던 내가 요새는 그냥 가만히, 다름이 느껴지는 순간에 머물러 있는다. 무언가를 하려고 몸을 움직이거나 어딘가 통증이 느껴져서 내 몸의 상태를 감각해 볼 때에도 이전에는 휙휙 지나쳤던 어떤 순간과 느낌들에 가만히 머물러본다. 통증과 함께 올라오는 불안감도 천천히 사그라든다.


잠시 머무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그 고요함의 순간에 포착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전에는 내가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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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행을 다니는 친구가 본인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는 단어, 억양, 몸짓이라던지,

그런 나의 친구를 바라보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눈빛이라던지,

찻자리를 이끌어가는 팽주의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같은 것들이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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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고요해진 호흡 속에서 나도 모르게 포착하는, 순간순간의 주변 모습들은 내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타인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타인의 감정들이 이해되고 와닿는다.


느리고 평온한 호흡은 내 몸의 신호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준다.

잔잔한 들숨과 날숨, 그 사이의 고요하고 긴 공백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몸의 감각, 통증, 긴장이 드러난다. 아 내가 이걸 먹으면 복부 전체에 긴장이 생기는구나. 나도 모르게 고관절을 계속 들어 올리는 습관이 있었구나.

잔잔한 호흡 덕분에 더 이상 황급히 노를 젓지 않아도 여유 있게 수면 위에 배를 띄울 수 있게 된 나는 그 배 안에서 상체를 바로 세우고 고관절의 긴장을 놓아주고 단단했던 허벅지가 부드러워지면서 스르륵 지면에 감싸 안아지는 발바닥의 감각을 느껴본다. 땅이 나를 지지하고 내 몸은 땅에 놓인다. 안전하다.

느려진 호흡 속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살아왔던 그 어떤 날보다도 느리고 고요한 요즘이다. 길어진 호흡만큼 나의 마음도 느리고 넓어진다. 내 마음의 수면은 오늘도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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