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ulsim Sep 03. 2022

잔잔한 호흡, 느려진 순간

100-4

호흡이 길고 느려지면서, 무언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잠시 흐르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 실없는 소리라도 한마디 던지던 나였는데, 요즘은 그 침묵에 한참 머무르게 되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의 이야기에 형식적인 공감을 해주던 내가 요새는 그냥 가만히, 다름이 느껴지는 순간에 머물러 있는다. 무언가를 하려고 몸을 움직이거나 어딘가 통증이 느껴져서 내 몸의 상태를 감각해 볼 때에도 이전에는 휙휙 지나쳤던 어떤 순간과 느낌들에 가만히 머물러본다. 통증과 함께 올라오는 불안감도 천천히 사그라든다.


잠시 머무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그 고요함의 순간에 포착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전에는 내가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들.



함께 여행을 다니는 친구가 본인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는 단어, 억양, 몸짓이라던지,

그런 나의 친구를 바라보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눈빛이라던지,

찻자리를 이끌어가는 팽주의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같은 것들이 포착된다.



편안하고 고요해진 호흡 속에서 나도 모르게 포착하는, 순간순간의 주변 모습들은 내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타인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타인의 감정들이 이해되고 와닿는다.


느리고 평온한 호흡은 내 몸의 신호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준다.

잔잔한 들숨과 날숨, 그 사이의 고요하고 긴 공백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몸의 감각, 통증, 긴장이 드러난다. 아 내가 이걸 먹으면 복부 전체에 긴장이 생기는구나. 나도 모르게 고관절을 계속 들어 올리는 습관이 있었구나. 

잔잔한 호흡 덕분에 더 이상 황급히 노를 젓지 않아도 여유 있게 수면 위에 배를 띄울 수 있게 된 나는 그 배 안에서 상체를 바로 세우고 고관절의 긴장을 놓아주고 단단했던 허벅지가 부드러워지면서 스르륵 지면에 감싸 안아지는 발바닥의 감각을 느껴본다. 땅이 나를 지지하고 내 몸은 땅에 놓인다. 안전하다. 

느려진 호흡 속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살아왔던 그 어떤 날보다도 느리고 고요한 요즘이다. 길어진 호흡만큼 나의 마음도 느리고 넓어진다. 내 마음의 수면은 오늘도 잔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사람의 호흡은 파도와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