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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Dec 02. 2020

11. 왕가위- 운율이 만든 순간의  시선

청바지의 스티치- 매혹의 리듬








-  영화 감독 왕가위 / 이미지 출처: 구글  -







나는 비디오(video) 키드(kid)였다. 주말 아침 기상 시간을 앞당기게 했던 디즈니 만화동산이 못다 채운 갈증을 연이어 비디오로 빌려서 볼 만큼 자연스러운 문화였다. 가세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텔레비전과 비디오 플레이어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자리를 지켰다. 귀여운 다람쥐 삼 형제로 시작한 만화 비디오가 TV에서 방영해주던 '주말의 명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내 비디오 사랑은 날개를 달아 영화로 향했다.






- (좌측에서부터)  무협 판타지 영화 <천녀유혼> , 밀키스의 주윤발과  투유 그랜드의 장국영  / 이미지 출처: 구글 -




'사랑해요 밀키스!', '투유 초콜릿'으로 대표되던 유명한 cf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까지 국내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홍콩영화가 남긴 추억의 한 조각이다. 할리우드 블럭버스터의 막강한 공세 속에서도 유달리 선전했던 그 당시 홍콩영화는 정말 폼 났다. 도시를 배경으로 혈투를 벌이고 무림 고수들이 강호를 누비던 신비한 무공의 세계가 공존하는 홍콩 영화 유니버스(universe). 현대와 고전의 앙상블은 아시아권을 넘어 서구 사회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무협 영화는 서양 사람들이 꿈꿨던 동양 판타지를 양껏 충족시켜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홍콩 배우들의 인기는 공중파 음악프로그램과 예능에 단골 초대 손님으로 나올 만큼 각별했다. 우리가 유달리 그들을 사랑한 것은 어딘지 모르게 풍겨오는 특유의 아우라 때문이었다. 과거 아편전쟁으로 인해 1898년부터 99년간 영국에 귀속되었다가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역사적 배경은, 동서양의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정서가 함양된 새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아류작과 표절, 폭력조직 삼합회의 이권에 둘러싸여 홍콩영화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자초한다. 하나의 아이템이 흥행하면 우후죽순으로 비슷한 스토리와 낮은 퀄리티의 졸작이 쏟아졌다. 초반에 가졌던 신선함은 진부함의 표본이 되고 있었다. 영화계가 제 살을 깎아 먹으며 피폐해 갈 때 혜성처럼 나타난 왕가위는 홍콩 영화의 용자(勇者)다.





- 1988년 홍콩에서 개봉 한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 / 이미지 출처: 구글-



-  <열혈남아> 의 영상 이미지 캡처 -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방송국 작가로 출발한 그의 첫 번째 감독 데뷔작 <열혈남아>는 개봉과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홍콩 액션 누아르의 시류를 따르되 자신만의 색깔을 표출하겠다는 왕가위의 작정이 드러난 영화였다. 저돌적인 액션만을 주야장천 보여주지 않고 인물의 심리 묘사를 사물과 환경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보여주려 하였다. 다소 단절된 느낌이 드는 과감한 편집도 그가 가진 감성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화에 사용한 핸드핼드(Hand-Held) 기법은 보다 생동감 있고 감각적인 영상미를 연출하며 스타일리시한 왕가위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핸드핼드(Hand-Held) 기법: 카메라를 어깨에 들쳐 매고 손으로 그립을 잡은 채 찍거나 휴대용 카메손으로 들고 찍는 촬영 기법을 말한다.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기 때문에 화면이 수시로 흔들리며 산만한 느낌과 현장감을 준다. - 출처: 나무 위키-




- < 아비정전 >의 포스터/ 이미지 출처: 구글 -



- 녹색의 색감으로 이루어진 영화  <아비정전>  / 이미지 출처: 영상 캡처 -




1990년 개봉한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은 왕가위 스타일을 뚜렷하게 보여준 영화로 해외 영화제와 평단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관객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외면당한다.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에 시종일관 감정이 널을 뛰는 주인공 '아비'의 방탕함은 주변 인물들의 삶과 엮이며 극에 복잡한 감정이 고조된다. 아비의 출생 과정에 갖게 된 본(本)에 대한 그리움은 그가 탕아(蕩兒)가 되어버린 결정적 사유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 뿌리에 대한 갈망은 타인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멋대로에 파괴적인 행로가 뒤따랐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턴테이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여유를 느껴면서도 불완전한 자신을 상기시키며 고뇌한다. 결핍된 자아의 방황은 초록색 열대 우림이 우거진 필리핀의 전경에 둘러싸여 시작과 끝을 채운다. 녹색이라는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색채가 우울함을 가득 머금은 수증기처럼 축축이 스크린에 젖어든 모습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한다.






- (좌측부터)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  이미지 출처: 구글 -


-  (좌측부터)   <춘광사설 (해피투게더)> ,  < 화양연화 >,  < 2046 >  / 이미지 출처: 구글 -




사랑과 결핍의 정서는 왕가위 영화의 맥(脈)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흐르는 기운이며 그것은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 현재를 지배하며 머문다. 유난히 극 중에 많이 등장하는 시계와, 음악은 가장 대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로 쓰인다. 장르와 시대적 배경을 초월하여 오직 사랑으로 인해 촉발된 인간의 모든 감정을 얘기하는 사명이 있는 듯 작품에 공통적으로 담겨 저 있다.



1958년 상하이 출생인 왕가위는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외향 선원으로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그의 아버지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에 가면 돈을 벌 기회가 많을 거라 판단했다. 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고, 동반 자녀를 한 명으로 규제하는 바람에 삼 남매 중 막내인 왕가위를 먼저 데리고 왔다. 추후에 남은 자녀를 데리고 오려했으나 곧이어 엄격해진 규정에 막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이때 가족과 떨어져 친척집에 남겨진 형과 누나에 대한 왕가위의 부채의식은 함께 하지 못 하는 시간과 그리움을 그에게 각인시킨다.



홍콩이 가진 특수성은 동양과 서양이 혼재하며 새로운 질서를 가진 도시 국가를 만들었다. 상하이 태생인 왕가위의 이방인으로써 정체성은 과거의 장소가 만든 추억과 홍콩의 시공간을 오가며 남다른 창조의 원천이 되어 준다. 그에게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근본적인 심상의 토대가 영화라는 시각적 수단과 만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 (좌측부터)  미술감독겸 의상디자이너 -장숙평 , 영화감독- 왕가위 ,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  / 이미지 출처: 구글  -



초장기 영화부터 현재까지도 왕가위 영화에서 비주얼(visual )의 중요성은 크다. 극의 전체적 인상을 잡아주는 색감과 구도, 공간이 주는 깊이와 의미, 스토리와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적재적소의 의상과 소품이 어우러져 나타난 현상. 모두가 왕가위와 함께 영화를 이끌었던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과 미술 감독 겸 의상 디자이너인 '장숙평'의 합이 만들어낸 섬세한 밸런스다. 완벽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정 삼각형처럼 어디 하나 치우쳐짐 없이 서로가 보완되면서 생성되는 세계. 각자가 창작자인 세 사람에게 더없이 훌륭한 작업인 것이다.








-  데님의 스티치(stitch) -




청바지의 스티치(stitch)는 옷을 완성하는 방법이자 도구다. 디자인에 따라 실의 색을 달리하고 데님 위에 놓이는 위치와 간격이 변화를 이룬다. 실루엣과 색상이 가장 먼저 눈을 통해 들어 오지만 옷에 담긴 이야기의 흐름은 스티치로 통한다. 1인치(inch) 안에 들어 있는 땀수의 크기와 양에 따라서 강약의 박자가 조성된다. 티끌 같이 작은 모양새가 열(列)을 맞춰 이뤄낸 순간, 직선과 사선 또는 곡선을 만들며 그리는 형태는 리듬이 되고 어느새 매혹적인 선율로 다가온다.  



왕가위가 스크린을 통해 전하는 황홀한 영상 속엔 그 보다 매혹적인 인물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피사체가 가진 매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다. 단순히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 배우를 아름답게 찍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찍는다 말했던 인터뷰의 대답이 진실로 다가오는 것은 영화를 볼 수록 확연해진다. 사랑이라는 운율이 만든 순간의 시선은 은막 안에서 아름다움의 본능을 일깨우는 리듬이다. 때론 즉흥적이고 서정적이며 관능적인 우수를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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