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 고양이 동생들
우린 오 남매였다. 인간과 개, 고양이 두 마리의 가족관계가 시작된 중심에는 미니가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여자였던 나와 성별이 같은 강아지가 내 동생이 되면서 가슴에 차오르는 든든함. 그걸 그 애도 아는지 유독 나를 좋아했다. 늘 내 곁 왼쪽에서 잠을 청하던 어린 강아지는,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30대 후반을 함께 하며 성장하고 나이 들었다. 2021년 7월 29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에 나를 두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3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떠나보낸 후의 날 들을 마주한다.
애초에 이별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 죽음은 곧 소멸이고 헤어짐인 것을.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한답시고 나는 너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다는 글을 썼다. 떠나보낼 용기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아둔한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이 글을 쓴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미니와의 시간과 추억을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에 썼지만 돌이켜보니 죽음을 오히려 더 가깝게 끌어당긴 셈이었다. 대중에게 병명과 이름을 밝히고 암의 원인이었던 종양 초음파 사진까지 올리다니, 지금은 사진을 지웠지만 내 행동에 대한 잘못은 지워지지 않는다. 극심한 고통을 참아가며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미니를 볼수록 신께 살려달라 기도드린 행동과 모순되는 배반. 내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신실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글과 사진을 올릴 게 아니었다. 암 따위는 싹 낫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아니면 수술이라도 시키지 말아야 했었다. 늘 수술 결과가 좋았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는 안일함. 수술 후 하루 이틀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란 말과 다르게 보름 가까이 입원하고 중간에 카테터가 빠지면서 수액을 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해 신장이 망가졌다. 늦은 대처에 미니는 또다시 전신 마취를 해야 했고 수술 전 상태와 다르게 기력이 점점 쇠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보호자로 기민하게 보면서 항의하지 못했다. 잘못된 점을 나중에 다른 병원에서 소견을 듣고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코로나로 하루 한번 10분 이내의 제한된 면회에 큰 병에 걸린 내 동생이 가엽고 슬퍼서 그저 울기 바빴다. 고령의 나이에는 사람도 수술을 안 하는데 왜 20살이 넘는 노견을 수술시켰느냐는 말을 들었다."수술 안 시켰으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말과 함께.
대기실에서의 미니- 씩씩하게 수액을 맞고 약도 잘 받아먹어 주어서 너무나 대견했다.
5개월의 투병 기간 중 위독했던 수술 후를 지나고 잠시 몸이 회복된 때가 있었다. 산책할 때 유모차에서 내려주면 씩씩하게 걷고 운동하는 모습에 나는 미니가 다 나은 줄 알았다.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아니 그때라도 강하게, 절실히 내가 기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병이 낫지 않은 것은 하늘에 내 마음이 닿지 않아서란 걸 안다.
병원에선 방광암이 생긴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실외배변을 하던 미니가 내 퇴근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소변을 참았던 게 가장 컸으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배변패드 사용법을 가르칠 때도 있었지만 협소한 공간에 고양이 두 마리의 화장실까지 놓이게 되니 깔끔한 성격의 미니는 실내 배변을 하지 않았다. 그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실내 배변을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또 우연히 본 풍수지리에 따르면 집 안 공간에 비해 물건이 많이 차 있으면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함께 사는 가족이 아플 거랬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 작은 원룸에 온 뒤로 내가 큰 수술을 하고 미니도 암에 걸렸으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병의 원인을 제공하고 나는 미니를 너무 외롭게 방치했다. 평소 퇴근 시간도 늦었다. 주말엔 격주로 토요일 근무를 하는 공장에 찾아가 무급으로 시다 일을 도와주면서 봉제를 배운다고 나갔다. 퇴근 후와 주말엔 시장조사를 한다고 옷을 보러 다녔다. 그때 내게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좋아하는 데님을 더 빨리 많이 알고 성장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강아지에서 노견이 되어서까지 나만 바라보던 미니는 산책을 보채거나 밥투정 한번 부린 적 없이 그저 내 곁에 머물러 병들었던 거였다.
신장 기능의 약화로 매일 피하수액을 주입하기 위해 나는 미니의 등에 뾰족한 나비침을 꽂았다.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눈 건강도 나빠져 수시로 눈에 안연고와 안약을 넣어 주었다. 암에는 탄수화물은 적게 먹고 단백질을 공급해야 하지만 신장이 계속 악화되면서 병원에서 처방한 특수 액체 사료로 단백질을 제한하는 식이요법을 하게 됐다. 미니의 몸은 갈수록 말라갔다. 앞다리의 힘이 빠지고 마침내 뒷다리 힘마저도 빠지게 되어 스스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걷지 못하는 미니는 울었다. 그게 마음이 아파서 걸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는 전기 침치료를 받았다. 첫 번째 치료 때는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두 번째 침 치료를 받고 온 저녁부터 이틀 동안 선혈을 쏟아내고 조혈제 주사 처방을 받아 간신히 피가 멈췄다. 아픈 아이를 돕고자 한 치료가 몸을 더 상하게 하였으니 보호자인 나는 망연자실했고, 치료를 했던 수의사분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보호자인 내게 사과하셨다. 인간보다 몇 배는 더 고통을 잘 참는다는 동물이 개다. 그런 아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대학병원에선 피부로 흡수시키는 펜타닐은 미니에게 쇼크가 올 수도 있다고 경구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이젠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하루에 두세 차례 밤낯을 가리지 않고 병원을 다니며 진통제 주사를 더 맞혀야 했다.
이 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한 수의사의 서투른 처치에 놀란 미니는 목에 사경이 왔다. 왼쪽으로 돌아간 목은 시간이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당 병원에 항의하자 노견의 건강 상태는 예측불가라 어쩔 수 없다며 더는 주사를 못 놓아 주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새벽에 우리를 문 앞에서 내쫓았다. 원래 다니던 병원에 비하여 더 가깝고 주사 가격과 야간 진료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그곳에 미니를 데려갔던 내가 싫었다. 사고를 일으킨 담당자의 사과도 없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어려운 건가. 며칠 뒤 참다 참다 분통 터져 해당 병원에 전화를 했다. 당시 처치 상황을 내 눈으로 보았기에 잘못된 부분을 따져 물었다. 그 일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몇 차례 진료를 해 주셨던 선생님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대신 사과하셨다. 잘못된 방법으로 주사를 놓은 게 맞다고. 그 사건의 당사자인분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미안해하며 보호자인 내게 전화라도 하려 했지만 도리어 내 화를 더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에 병원 측에서 막았다고 하셨다. 한참을 울었다... 그래, 일부러 그러려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분도, 병원 입장도 이해한다고 했다. 혹시나 이번 일로 앞길 창창한 수의사분이 주사 못 놓는 트라우마라도 생길까 싶어, 우리에 대한 미안함은 접고 잘 배워서 아픈 동물들 진료하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아프고 수술과 회복 기간을 거친 후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일을 하지 못해 재정상태가 바닥났다. 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삶의 강한 의지를 보이는 모습에 어떻게든 힘닿는 데로 이 아일 돌봐주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집 근처 1차 병원과 수술을 한 2차 병원에 이어 마지막 희망을 갖고 대학병원도 함께 다녔고 나는 대출을 받았다. 오랜만에 전화한 지인에게 대출 사실을 말하자 "사채는 빌리는 거 아닌 거 알지?"라는 말을 했다. 내가 돈을 융통해 달란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더불어 코로나로 사람들이 씀씀이를 줄이느라 옷을 안 사는데 의류업에 종사했던 내가 일을 하긴 더 어려울 거라 말한다... 이러한 얘기를 들은 이후 병원비에서 가성비를 생각하게 되었다. 동물병원 진료 시간 때 별로 부과되는 할증료가 있는데 통증의 시기를 알 수 없으니 같은 약이라도 병원에 따라, 또 내원 시간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크게 났다. 게다가 집을 나설 때와 다르게 막상 병원에 도착해서 큰 통증의 징후를 보이지 않으면 진통제 주사를 놓아주지 않으니 택시를 타고 병원 두 곳을 번갈아 다녔다. 그러다 본 진료와는 별개로 진통제 주사는 야간 진료비가 더 저렴한 곳으로 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참담했다. 변변찮은 보호자인 나 때문에 미니는 더 고통받았다.
결국 모든 게 미덥지 않은 보호자인 나로 말미암은 일들이다. 그저 곁에 더 오래 두고 싶다는 내 과욕이 불러온 말로다. 수술 전 여러 병원의 소견을 더 들어보고 부작용이나 잘못될 가능성도 염두해야 했다. 남은 여명을 생각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미니를 위한 최선인지 깊이 숙고해야 했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혹시 모를 변수로 인한 피해들도 감안하고 하겠다는 약속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수술을 시키지 않았다면 그 또한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 지금도 번갈아 든다. 이 나약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여전히 되뇐다. 바보인 나완 다르게 마지막 순간까지 총기 있던 그 아이는 "병원으로 오빠가 오고 있어. 오빠 보고 가야지 미니야!"라는 나의 말에 꺼져가던 심장을 다시 힘차게 뛰게 했고 30분 뒤 도착한 오빠와 인사를 나누고 하늘로 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혀의 괴사가 올 지도 모른다는 말에 입 안을 주시하며 돌봐 괴사가 오지 않았고, 체위를 수시로 바꿔주고 점점 차가워지는 말초 부위를 따뜻하게 찜질하고 주물러 욕창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 주엔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해서 긴급히 병원에 갔는데 진료를 잘 봐주신 수의사분의 항생제 주사로 패혈증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미니의 몸이 손상 됐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거다.
함께 산책을 가던 하천을 바라보는 미니
그 애를 떠나보내고 가장 많이 든 생각. 차라리 내가 강아지고 미니가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하고 함께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 미니가 현명한 생각으로 잘 이끌어 후회 없는 선택을 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애처롭다. 날이 갈수록 즐거웠던 추억은 흐려지고 잘못했던 일들이 선명해질 뿐이다. 함께 산책하던 하천에서 물소리를 듣는 미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울고 있는 내 얼굴을 핥아 주던 그 아이는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오래전 일본에 가느라 집을 비웠을 때 미니는 다른 가족이 주는 밥은 먹지 않았다는 옛일이 떠오른다. 내가 고작 며칠 없었다고 밥을 굶는 존재가 이 세상에 너 이외에 또 있을까? 내가 찌개를 끓일 때 깍둑 썰은 두부를 한번 더 손으로 뜯어 작아진 것을 입에 넣어 주면 고소한 두부 맛이 좋다는 듯 웃으며 맛있게 받아먹던 너였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유일한 존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함께한 이후부터 네가 없어지는 날들은 떠올린 적이 없었기에 이별의 깊이를 체감할 수 없어서 나는 감당도 못하는 섣부른 헤어짐을 감히 떠올렸나 보다. 슬픔이 굽이치고 스며들어 가슴은 시간이 갈수록 공허하다. 밥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너에게는 나 하나면 됐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언제나 조용히 보내준 다정하고 변치 않는 너의 사랑을 당연하듯 받기만 했다. 나 하나만 바라보던 너를 더 위했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뿐이다. 이제 것 내가 살아온 것은 강인한 신념도 꿈에 대한 열망도 아니었다. 나를 향한 너의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내가 너를 키운 게 아니라 오히려 보살핌을 받은 나였다.
미니가 떠난 그날 저녁, 신기한 경험을 했다. 분명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든 상태고 미니의 시신도 사용하던 침구에 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내가 공중에서 보았는데 누워 있는 내 옆에 미니의 혼이 등을 침대에 대고 앞다리, 뒷다리를 신나게 흔들며 누워있는 내 몸에 다가가 비비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이제는 육신이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나타나준 거였을까?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켜 내 침대를 바라보았는데 헝클어진 이불만 올려져 있고 다른 한쪽에 기척 없이 누워있는 미니의 시신을 보니 다시금 죽음을 실감했다.
장례식 전에 최대한 함께 오래 있고 싶었다. 7월의 무더위에서 보호하기 위해 에어컨을 최대치로 시원하게 틀어 방안 온도를 낮췄다. 미니의 침대엔 냉매를 깔고 수건과 패드를 위에 덮어 눕혀 주었다. 누워 있는 몸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었는데 어제저녁과 다르게 미니의 입 안에서 냄새가 났다. 병원에 서둘러 전화를 했다. 수술했던 2차 병원에 야간 진료를 담당하시며 우리를 많이 도와주신 선생님께 연결되었고 겉 보기엔 깨끗해 보여도 사후 즉시 몸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이 더 지나면 시신이 훼손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내 욕심으로 더 곁에 두자고 조금이라도 몸이 손상되게 둘 순 없었다. 일요일에 예정되었던 장례를 토요일 오전으로 앞당겼다.
영정 사진을 넣은 액자, 미니가 좋아하던 음식과 꽃다발을 준비하고 옷장 깊숙이 보관하던 수의를 꺼냈다. 병세가 악화되고 주문해 두었던 수의를 막상 입히는 날이 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드 세장을 준비해서 아빠와 오빠, 내가 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각자 적었다. 장례지도사님은 미니의 상태가 깨끗해서 손댈 필요가 없으니 바로 수의를 갈아입히자고 하셨다. 나와 가족들은 수의를 입히고 꽃을 잘라 관 안을 채웠다. 전체를 감싼 수의보 위를 꽃으로 장식하고 화장터로 가려는데... 마지막날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주삿바늘을 꼽고 몸 주변에 부착한 기기 때문에 내가 안아주지 못한 것이 떠올라 울었다. 오빠는 이젠 더는 안아줄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안아주라고 했다.수의보를 장식했던 꽃을 잠시 거둬 놓고 미니를 안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렇게 인사를 한 후 화장터로 가서 몇 시간 뒤 한 줌의 재로 변한 미니와 다시 만났다. 유골함에 담아 함께 집에 오고 나니 그 예쁜 강아지는 어디 가고 작은 도자기 단지가 홀로 있는 모습만 우두커니 바라보다 눈물만 흘렀다.
며칠뒤 동물등록에 미니의 죽음을 신고를 하기 위해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출생 연도가 오기재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구청의 담당자분께 문의하니 정정하려면 방문해야 한다고 하셨다. 미니가 살았던 날들이 실제보다 적게 기록되게 둘 순 없었다. 함께 한 시간들마저 사라지는 마음이 들었었기에. 장례식장에서 준 동물 장례 확인서와 신분증을 보여드렸다. 내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담당자분은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동물 등록 상세 화면'을 출력한 종이였다. 사망으로 등록되면 이제 미니의 기록은 사라진다고 했다. 그전에 내게 출력해서 주신 것이다. 우리 미니가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렸다.
오랜 방황을 했다. 병간호를 했던 때를 복기하며 "그때 이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이 약을 먹였어야 했는데...", "내가 잠들지 말고 계속 돌봤어야 했는데..."라고 놓쳤던 일들의 한탄 만이 있었다. 초반엔 기민하게 움직여 대처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잠이 부족해졌다. 많은 종류의 약을 시간 때 별로 먹이면서 알람을 맞춰 놓고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고 먹이 고를 반복했다. 더불어 통증으로 수시로 병원행. 신장 수치를 떨어뜨리려면 혈관으로 주입하는 수액 처치가 가장 좋지만 수술 이후 쇠약해진 노견을 입원시켜 수액을 맞춰주는 곳은 없었다. 동네 1차 병원의 배려로 혈관 바늘을 잡아주면 수액 팩은 집 옷걸이 스탠드에 매달아 내가 밤새 지켰다. 수액이 떨어질 즈음에 맞춰 다시 새 수액을 교체하러 갔다. 하지만 갈수록 혈관이 잡히지 않아 나중엔 피하수액만을 주입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나중에는 너무 무뎌졌다. 일지를 적어가며 체크했던 바이탈 사인의 불안정한 수치도 나중엔 지속되는 병의 일환으로 치부되었다. 미니에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몸의 징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 눈을 가렸던 것이다. 본래 어리석은 나는 미니의 시간이 인간인 나의 시간과 다름을 염두하며 살지 않았다. 그걸 생각했다면 미니는 행복하고 나는 후회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니를 보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를 지지하던 가장 큰 존재가 파해쳐진 자리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었다. 텅 빈 마음을 채우려 생활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유기견 단체에 많게는 한 번에 몇십 만원식 현금 기부를 하고 필요로 하는 물품을 주문해 택배로 보냈다. 유기견이었던 미니가 떠올라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보호소 안의 이권 다툼과 오랫동안 선의로 꾸준한 기부를 하던 회원분에게 안 좋은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후원 대상을 어린이 단체로 바꿨다. 이제 제대로 된 곳을 알기 전까지 유기견 단체는 후원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히려 유기견들에게 가족이 되어 줄 사람을 돕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2022년 5월 31일 국립중앙박물관에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시회를 보기 위해 방문한 날, 기념품 가게에서 미니와 닮은 그림을 발견했다. 조선시대 화가 이암선생의 <모견도>. 축 처진 귀는 다르지만 선한 눈매와 모색이 닮아 있었다. 게다가 새끼 강아지들이 함께 있는 모습에 미니가 더 떠올랐다. 2005년 한 번의 출산을 했던 미니는 아이들을 태어나자마자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이 그림처럼 정답게 만나 함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발견한 따뜻한 그림에 더없이 큰 위안을 받았다.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니 천국의 나무그늘 아래서 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미니와 강아지들은 반드시 갔을 천국에 내가 갈 자신은 없지만 다시 만날 날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 만으로 기운을 차려 살아갈 힘을 냈다.
2022년 10월 5일 내게 나타난 강아지 구름
2024년 12월 31일 맑은 날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늘나라로 떠난 뒤에 왜 내 꿈에 잘 나오지 않는지 슬펐다. 뭔가 미니를 꿈에선 본 것 같기도 한데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주변 사물에서 미니의 존재를 느꼈다. 길을 걷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에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미니와 살고자 했던 집을 찾고 엎어졌던 계약을 다시 할 수 있었던 때에도. 일을 구하기 어려워 신청한 공공근로에서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신경은 다치치 않았던 날에도. 나를 돕고 보호하는 기운은 뭐라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니였다. 그런 순간들을 종종 마주하면서도 꿈에 나오지 않는 건 아직 내 주변에서 머물기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 때엔 그건 내 착각이고 내게 서운한 게 많아서 꿈에 나오지 않는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에 잘 올라갔으면 강아지 구름으로 볼 수 있게 찾아온다는데 하늘을 올려 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미니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데 날씨마저 흐려 우울했던 날에 우이천을 걷다가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산마루 위에 펼쳐진 커다란 강아지 구름. 날렵한 옆모습에 삼각형의 쫑긋한 귀와 동그란 엉덩이에 꼬리까지... 건강하게 산책하던 미니의 모습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2022년 10월 5일 오후 6시 8분. 스마트폰 카메라가 기록한 촬영정보는 미니가 이제 정말 나를 떠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감을 보여주었고 지금까지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내 곁에 있다고 느낀 것이 사실임을 알게 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너의 흔적이 스민 하늘을 보며 혹시나 구름으로 또 다른 소식을 전해줄까 싶어 하늘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 미니의 사진 앞에 미니를 닮은 키링과 동물 친구들-
2023년 3월 13일 이사 온 지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 문구점에 미농지가 있는지 물어보려 들어 갔다. 입구 맞은편 중앙에 다양한 액세서리가 진열된 곳에서 한눈에 들어온 키링. 미니와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특히 귀가 접힌 부분까지도 너무나 닮아서 놀랐다. 그런데 예쁜 형상에 눈이 그려져 있지 않아 내가 그려 넣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사망 후 내 손으로 살포시 감겨준 눈을 떠올리니 억지로 새겨 넣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후 포켓몬 빵에서 미니를 연상시키는 스티커가 나왔다. 이렇게 그 아이를 닮은 무언가가 내게 다가올 때마다 미니가 다른 세상에 가서도 여전히 나를 향한 마음을 보낸다고 느낀다. 속해 있는 세계는 다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통하고 있다고. 홀로 외로워하지 말라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우연으로 찾아와 주고 있었다. 그해 가을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재개봉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보았다. 멀티버스 세계관이 말하는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 안에 무수히 많은 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드넓은 미지의 세계인 우주, 지구별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기에 또 다른 차원 역시 반드시 존재 하리란 믿음이 생겼다. 미니도 다른 차원에서는 지금 건강하게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찰리브라운과 스누피가 함께 있던 장면을 모티브로 미니와 나를 그렸었다-
얼마 전 집정리를 하면서 사진첩 안에서 오빠가 미니를 앉고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발견했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고 초점도 흐린 사진이었지만 무엇보다 어린 강아지 시절의 미니가 건강하던 그날을 보게 되어 기뻤다. 더불어 이때 안 사실은 사진 속 오빠는 고3 때 했던 짧은 상고머리라는 것! 두 살 터울인 남매의 나이차로 내 기억의 오류를 깨닫게 되었다. 미니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가 아닌 1학년 겨울 방학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었던 밤색 장롱 앞에는 내가 입고 다녔던 겨울코트가 함께 걸려 있었다. 21살이 아닌 22살까지 함께 이 세상에 살다 갔다는 걸 알려준 고마운 사진의 발견. 미니는 또 한 번 내가 있는 세상에 접속해 이렇듯 마음을 달래주었다.
내 꿈길에 열렬한 지원군이자 다정다감한 나의 미니. 옛날에 너에 관한 고마움을 쓴 글에 함께 올릴 그림을 그렸었다. 그로부터 1년 1개월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 너의 죽음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람은 태어나 꿈을 품고 사는데 너는 어떤 꿈을 가슴에 담고 살았을까? 아마도 가족이 최초의 사랑이자 꿈으로 새겨져 있지 않을까? 내가 그 안에 작은 일부분으로 마지막까지 같이 했음에 감사한다.
내 인생에 나타난 준 너는 여전히 현존하는 사랑이야. 네가 가장 큰 행복이고 내 삶의 위안이었다. 너는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떠났는데, 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남겨진 나는 앞으로 그걸 떠올리며 살아갈 거다.
나는 매일 하늘을 보며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내 동생, 내 강아지, 아름다운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