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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Nov 02. 2023

자유. 버겁거나 실체가 없거나.

<인투 더 와일드> <월플라워><스펙타큘러 나우>

아이, 남편과 공원을 산책하는데 황토색 버섯이 있었다. 아이와 독버섯을 잘 구별해서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독이 있는 식물을 먹고 죽은 맥캔들리스의 얘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인 투 더 와일드>라는 영화가 있다. 그는 알래스카의 야생에서 블루베리와 닮은 독성 식물인 벨라돈나를 먹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맥캔들리스는 미국의 명문 에모리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졸업 후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고 야생으로 떠난다. 떠나기 전 그는 신분증을 버렸고 신용카드를 잘랐고 현금을 불태웠다. 콜로라도강에서 카누를 타고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고, 우연히 어떤 소녀를 만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생을 살아나간다. 


하지만 내 기억에 각인된 건 독 있는 식물을 먹고 죽은 그의 최후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미국의 한 청년이 모든 사회 질서를 거부하고 야생으로 떠났는데 독 있는 식물을 먹고 죽었어.”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게 뭔 영화야? 특별한 일 없었어?”라고 했고 남편은 “되게 멍청하네.”라고 했다. 나는 그 반응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 치우친 정보를 전한 것 같은 찝찝함에 그래도 아름다운 순간이 많았다고 변명했다. 


견고한 사회 질서와 ‘이렇게 해야된다’는 수많은 규칙들이 굴레처럼 갑갑하게 느껴졌던 이십대에 나는 ‘자유’를 추구했다. 그러나 사실 자유가 뭔지 잘 몰랐다. 막연했다. 자유는 친구들과 오픈카를 타고 주황빛 조명이 밝혀진 터널을 지날 때 두 팔 벌려 바람을 느끼는 이미지 정도로 여겨졌다. 영화 <월플라워>에서 나왔던 장면이었다. 가끔 방종과 헷갈리기도 했던 그 이미지. 


자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인물이 맥캔들리스였다. 내가 자유로 뛰어들지 못한 이유로 맥캔들리스의 험난한 여정, 그의 최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거친 야생의 힘들고 피곤한 삶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고 아무도 없는 오지에서 홀로 독 있는 식물을 먹고 죽고 싶지 않았다. 


자유는 이미지였다. 스무살 때 처음으로 친구끼리 차를 타고 이태원에 간 적이 있다. 늦은 저녁 강변북로를 통과하며 보이즈 투 맨의 <I Do>를 열창했다. 이태원에 도착해서는 손님 하나 없는 파키스탄 음식점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에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었다. 맛이 없었다. 그뿐이었다. 두 번째 드라이브는 없었다. 가로등이 일렬로 늘어선 차도, 보이즈 투맨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모든 게 하얬던 파키스탄 음식점, 밤의 드라이브. 그날 나는 자유의 이미지를 시연했지만 자유가 그 안에 실재한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방황하고 어디론가로 떠나고 자유의 이미지 속에 뛰어드는 것만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콜중독자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영화 <스펙타큘러 나우>의 주인공 청년 때문이었다. 가족을 버린 알콜중독 상태의 아버지를 생애 처음으로 만났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값을 내달라고 했다. 청년은 방종을 멈추기로 한다. 멈추는 것. 그것은 자유로워지려는 노력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흔들리고 방황하는 청춘의 이미지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청년의 모습이 그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것을 그 영화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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