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버드>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여고생 ‘레이디버드’ 는 엄마에게 말했다.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주면 좋겠어.
그 말에 엄마가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라고 대답하자 레이디버드는 되묻는다.
근데 좋아하냐고?
엄마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자식도 마찬가지일거다. 자식도 엄마를 사랑한다.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엄마니까, 자식이니까. 너무 극단적인 예이긴 하다만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 엄마 같은 엄마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엄마가 아니더라도 ‘그래도 엄만데’하며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엄마를 미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문동은도 마지막까지 ‘그래도 엄만데’를 놓지 못했다. 정말 끝까지, 밑바닥까지 갔을 때에야 엄마를 잘라냈다.
‘그래도 자식이니까’의 예로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들이 살인마다. 아들이 남편과 딸도 죽이고 죄없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아들이 커서 살인마가 되기 전, 세 살, 다섯 살, 열 살이었을 때도 아들은 엄마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가뜨린다던지 동생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등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들을 했다. 엄마는 자신이 이 아들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끝까지 책임지려 하고 아들이 수감된 감옥에 면회도 간다.
오히려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좀더 수월한 일인지 모른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부모고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때로는 노력으로도 사랑하지 못할 수 있지만 어느 지점까지는 사랑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노력으로 안 되는 것 같다. 사랑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부모 자식 관계가 틀어지거나 소원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 아침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죄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길래 물었다.
“넌 엄마랑 음악 취향이 똑같은 것 같다?”
“당연하지~ 엄마 아들인데.”
나는 이 말이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로 들렸다. 기분이 좋았고 고마웠다. 작년에 아이 담임선생님하고 상담할 때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승현이가 엄마에 대한 자부심이 되게 커요.”
아이가 학교에서 내 얘기를 자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들어보니 딱히 별말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승현이의 제스처를 따라하시며 “우리 엄마 책 되게 많아.”라고 했을 때 나는 빵 터졌다.
나는 이것을 꼭 지키고 싶다. 아이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가 할머니가 돼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아이가 나를 좋아해서 찾아왔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비결이 ‘들어주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피곤하거나 기분이 별로일 때는 잘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예전에 아이가 친구랑 놀다가 엄청 싸우고 헤어진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운전하고 아이는 뒷자석에 앉아 있었는데 아이가 계속 울었다. 나는 어떤 점이 아이의 마음을 속상하게 했는지 그 정확한 포인트를 찾고 아이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몇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그 질문에 답을 하며 자기가 왜 속상했는지를 스스로 깨달은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가 먼저 내렸다. 내리고나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뒷자석 문을 열고 나온 아이가 “엄마 고마워. 고마워.”하면서 내 품에 안겼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이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아이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한 순간들이 쌓였을 때 아이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고 믿는다.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자신을 이해해주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란 도무지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Daum 지식토스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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