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 인간은 왜 사는가?
최근에 본 두개의 영화가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다큐 <알피니스트, 어느 카메라멘의 고백>이다.
알피니스트를 보고나서 찹쌀떡이 목에 걸린것 처럼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오징어 게임을 보고 나서는 화장실에 다녀와도 뭔가 볼일을 마치지 못한 느낌의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콘텐츠를 통해 난 <인간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인 이정재가 끝까지 죽지 않을거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깔려있다. 소위 말하는 영화같은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플롯의 구성이나 시나리오의 탁월함 같은것을 논하기는 적절하지 않은것 같다. 각 에피소드가 주는 소재의 오락성과 미장센이 오히려 이슈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오징어 게임에서 딱한가지 끌고 올라와 써보고 싶은 주제는 '삶 혹은 인간의 가치' 였다.
오징어 게임에는 죽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자의 혹은 타의로 수억, 수십억의 빚을 갖게된 사람들이 각자의 죽음에 할당된 1억원이라는 목숨값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게임에 참여하게된다. 이들의 삶은 죽음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다. 큰 빚을지고 인생의 내리막길 혹은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재벌 혹은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의 목숨의 값은 차이가 있을까? 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목숨은 1억원이라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목숨이 돈으로 환산해보면 얼마일까? 나의 값어치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것일까?
붓다의 전생이야기를 모은 설화집인 본생담(本生譚)중 '시비왕 이야기'에서 목숨의 값어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매를 피해 날아온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시비왕이 매와 이야기를 나눈다. 시비왕은 매에게 비둘기의 목숨값 만큼 자신의 살을 떼어 비둘기의 무게 만큼 저울에 달았지만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시비왕이 자기 몸의 살을 다 베어 저울에 올려도 비둘기의 목숨값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 저울위에 시비왕이 올랐을때 저울은 평행을 이뤘다는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에서 메긴 한사람의 목숨값 1억원이 과연 공평한 것일까? 공평을 떠나 애초에 사람의 목숨에 돈으로 값어치를 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것이다.
알피니스트에는 히말라야에 오르는 산악인들의 삶이 리얼하게 카메라에 담겨 나온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하며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그들은 자연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정복하고 정상에 서서 환호한다. 그러나 그 도전이 실패했을때 자신의 인생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왜 그들은 산에 오르는 것일까?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는 그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일까?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임일진(카메라맨)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인터뷰를 하며 공허한 목소리와 눈빛을 보여준다. 자신의 동료들이 산을 정복하기위해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을 기록자로 참여했던 그는 이제 더이상 기록자가 아니다. 두번의 무리한 정상 정복 프로젝트를 시도하다 두명의 동료를 잃은 후 그는 사망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임일진 감독은 동료 두명을 잃은 순간에 그 산에서 자신의 영혼도 잃어버린것은 아닐까?
우리는 모두 허상을 쫓고 살아간다. 그것이 명예, 부, 행복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 미쳐 생각하지 못할때가 있다. 나는 지금, 인간으로 살고있는가? 그저 이 세상이라는 체스판에 놓여진 "말"에 불과한 것인가?
자본주의의 덫에 갖혀 혹은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한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깨어있는 삶을 통해 자신 혹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모든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다.
오늘도 내 삶에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내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