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김형수
장애학생의 진로를 돕는, 우리 시대의 참 좋은 쓰앵님
대학입시 현실을 소재로 높은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쓰앵님으로 불리는 인물이 나온다. 부유층 사교육 최전선에서 맹독을 품은 입시 코디네이터다. 그와 반대로 드라마 밖 실존 인물로 장애학생의 대학 진학을 돕는, 참 좋은 쓰앵님이 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95학번)를 졸업한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김형수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강사이기도 하다. 재학시절 장애인인권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를 만들었고 장애인교육권연대 사무국장을 비롯해 장애인의 권리와 소통을 위해 투신해 왔다. 20여 년간 독보적인 장애인 교육권에 헌신한 공로로 ‘2020 한국장애인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년 전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 문제를 유쾌한 어조로 전했다. 그의 강연은 유머가 넘치고 청중은 연신 박수와 환호를 터트린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 강연 중에 그만큼 당당하고 폭소를 자아내며 의연하게 전달하는 명강의는 없을 것이다.
다름을 넘어 ‘당당한 인간 김형수’로
그는 강연 결론부에 피터팬의 후크 선장을 예로 든다. “후크 선장은 애꾸눈에 갈고리 손을 갖고 있고, 다리도 한쪽이 없어요. 심한 중증장애인이죠. 그런데 아무도 그를 장애인 후크라고 부르지 않고 캡틴 후크라고 해요. 잔인하고 악한 캐릭터지만 장애를 숨기지 않고 팔자타령을 하지 않아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른 모습이지만 당당해야 해요. 다름을 넘어 당당함으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해야 하죠. 장애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멋있는 사람이 되려고 선택하는 거예요.”
그가 말하는 나쁜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에 억눌리지 않는 당당한 사람을 상징한다. 김형수는 1995년도 대학입시에 처음 생긴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제도’로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그 전형으로 연세대는 스물두 명의 장애인을 뽑았다. 연세대는 1964년 지체장애학생을 위한 특수학교인 연세대학교재활학교를 세웠고, 1993년 첫 시각장애인 교수인 이익섭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임용했다. 1995년 특별전형 시행 첫해에 장애인 학생들에게 입학의 문을 열었다. 특히 김동현 판사, 김진영 변호사 등 법전원 출신 시각장애인 법조인이 활약하고 있어 장애인에게 열려 있는 진보적 대학으로 손꼽힌다. 장애인 차별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 특별전형으로 문을 연 대학은 7개교에 불과했다.
“태어나면서 뇌성마비를 겪었어요. 안면마비와 언어장애는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는 어려움이 별로 없었어요. 다섯 살 때 목발로 걷는 것을 배웠고, 보행이 불편하다 보니 소아마비로 오해받기도 했죠.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완전 통합교육을 받았어요.”
김형수는 자존심이 상하거나 우울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기를 보내면 상처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강조한다.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이끈 어머니 교육에 힘입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컸다고 한다.
“방황은 있었지만, 장애에 대해 방어하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과 선생님 덕분에 사춘기를 잘 지나왔어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은 제 사진을 멋있게 찍어 주셨고, 중학교 선생님은 글짓기를 잘한다며 문학적 소양이 있다고 격려해 주셨어요. 고등학교 선생님은 앞으로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니 손으로 못 써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셨죠. 그런 좋은 해석과 반응 때문에 비장애인과 비교하거나 절망감에 시달리지 않고 인간 김형수로 생활해 왔어요.”
장애학생 대학 지원을 돕기 시작하다
김형수가 입학할 당시 연세대는 학부제 이전 마지막 두 학기로 선후배 공동체의 정이 가득한 시기였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입학했는데도 정작 장애학생을 위한 편의시설은 한참 부족했다. “장애인 화장실은 백주년기념관에만 있었어요. 편의시설 부족으로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친구들이 학교를 상대로 싸워 주기도 했고, 강의를 듣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죠. 같은 과 입학 동기로 장애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우리 과와 문과대는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이 높았어요. 문과대 학생회가 학교 측에 요구해 경사로 공사를 이끌어 냈죠.”
김형수가 장애인 학생을 위해 각성한 계기가 있다. “1996년이었어요. 당시 심리학과에 입학한 시각장애인 신입생이 자퇴를 했어요. 처음엔 몰랐다가 신문에 그 사실이 나면서 알게 됐어요. 한 해 먼저 입학한 우리는 고민에 빠졌죠. 시각장애인 후배가 입학했는데 점자 자료 하나 없고 여러 불편을 견디다가 자퇴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학교를 엎어 보자.’는 마음으로 장애인 운동을 시작했죠.”
그가 나서면서 동료 학생들의 큰 지지가 일어났다. 총여학생회가 나서 주었고, 학생운동하던 선후배들이 장애인 화장실 등 편의시설 구비를 함께 고민해 주었다. ‘게르니카’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었고 2대 회장을 맡았다. 게르니카는 미술 동아리가 아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표현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에서 이름을 따왔다. 장애인 화장실과 공중전화 경사로 등 장애학생을 위한 기본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특례입학을 시행한 교육부와 학교의 무지함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연세적십자회와 사회복지학과학생회 등과 연대한 김형수는 1일 장애인 체험 행사를 펼쳤고 장애인 복지 문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풀어야 한다고 설득해 일반학생 30여 명도 회원으로 참여시켰다. 게르니카는 장애학생을 위한 교육환경 조성을 촉구하고 장애인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등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김형의 노력으로 우리 대학은 학생회관 시설물에 점자 안내판을 부착했고, 경사로가 없는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는 등 시설을 보완했다. 아울러 일본 장애인 운동단체와도 교류를 추진하는 등 활동 영역을 국제무대로 넓혔다.
“학회활동에 열심이었고 연극도 하며 꽤 사교적으로 지냈어요. 협력해 주는 친구가 많았죠. 당시 학내 문화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이 함께하는 문화가 만연했는데 국문과는 특히 더 공동체적이어서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문과대는 장애학생이 많아요. 국문과 건너 사회학과에도 장애학생이 있었고,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님은 ‘너희는 왜 자기 권익을 위해 싸우지 않니? 싸워서 쟁취해’ 하며 우리를 지지해 주셨어요. 중증 장애로 그저 힘들어하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주셨어요. 게르니카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기도 했죠.”
1996년 10월에 만든 게르니카는 다음 해 공식 동아리로 인정받았고 현재 학내 기구인 장애인학생지원센터와 총학생회의 장애인인권위원회 설립의 계기가 됐다.
고마운 분들
장애인의 초중고 일반학교 입학은 여전히 배타적이다. 일반 공립학교에서 거부당하면 사립학교에 갈 수밖에 없다. 김형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배우는 통합교육 전도사다. 자신이 겪은 일을 토대로 통합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부산에서 올라온 김형수에게 입학합격증을 전달한 날이 2월 28일이었다. 기숙사는 이미 인원이 모두 찼다. 장애학생을 받아주는 하숙집은 없었다. 분노한 어머니는 학생처를 찾아가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방법이 없다고 거절하지 않았어요. 한참을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대학원생과 외국인 학생이 생활하는 국제학사에서 제가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그 직원분이 참 고마웠어요. 당시 연세대는 장애학생을 위한 시설과 배려가 부족했지만 감수성은 매우 수용적이었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키우며 늘 당당했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산대 국문과도 합격했지만, 어머니 뜻이 우리 대학에 입학하는 거였고, 신입생 개강 전에 국제학사에 한 번 오신 뒤 졸업할 때까지 형수의 생활을 들여보거나 개입하지 않았다. 졸업식도 복잡하다고 그 다음 날 학교에 오셔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제가 힘들 때 돕지 않았어요. 제힘으로 해결하며 자립하길 원하셨죠. 대신에 친구들이 가족 역할을 해 주었어요. 어머니는 그래야만 저한테 친구가 생긴다는 장점을 터득하고 계셨죠. 오히려 친구들이 저를 돕고 싶었는데 제가 도움을 거절했어요. 의학적으로 저는 중증 장애였지만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했어요.”
특히 고마운 분은 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박창일 교수다. 장애학생 입학 허가 당시 재활병원 병원장이었는데 “우리가 책임질 테니 뽑아라.”라며 장애학생을 지원해 주었다. 김형수는 학교 어디를 가든 자신의 편이 있었다고 한다. 세브란스 재활병원에서 무료로 혹은 큰 할인으로 치료해 주었기에 중증장애아 대한 두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입학 동기들과 함께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에서 일하던 중 신학과 이계준 교수가 손잡아 주었다. 그는 이런 감사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장애인 인권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김형수가 장애 인권운동을 하는 데 이론적 배경이 돼 준 스승이다.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의 입시 상담
게르니카 활동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다. 물리적 편의시설이 점차 확충됐고, KBS 9시 기자가 취재하기도 했다. 백양로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한 17초간 인터뷰가 나갔는데 반응이 거세게 일어나며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됐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은 거리에서 잘 보이지 않아요. 장애인을 보는 인식도 문제고 휠체어로 이동하기가 여전히 불편해요. 요즘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호소하고 있죠. 집에서 죽으나 지하철에서 죽으나 똑같다는 심정으로 싸우고 있어요. 저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배워야 해요.”
김형수의 재학시절엔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이 여전히 대세였지만, 장애인 인권운동에 관한 관심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는 환경운동과 페미니즘이 막 태동하던 시기다. 학내에서 장애인 관련 행사를 많이 했다. 서명운동, 집회, 영화제 등을 전개했고, 교내 차 사고 방지를 위해 차 없는 백양로 거리를 휠체어와 목발을 깔면서 추진했다. 장애인의 인권이면서 전체 학우의 보행자 인권도 주장했다. 김형수는 장애학생의 권리뿐만 아니라 전체 학생의 등록금 문제, 인권 문제에도 기여했다. 그가 말하는 장애인의 정의는 무엇일까?
“넓게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으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자들로 국가가 지원해 주어야 할 대상을 뜻합니다. 유럽은 결혼, 연애, 외로움의 문제를 겪는 사람도 장애인으로 정의해요. 가난해서 결혼 못 해도 장애인으로 보죠. 우리는 신체적인 문제만 장애인으로 봅니다. 유엔에서는 다문화인으로 해당 국가의 언어를 못 하는 것과 발달장애인이 언어를 못 하는 것 모두 장애인으로 등록해요. 우리는 농경사회 관점으로만 봅니다. 몸이 불편해야 장애인이죠. 한국은 장애인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불행하게 여깁니다. 장애 등록은 유용한 지원제도인데 등록을 꺼려요. 우리의 장애인 정의는 협소해요. 의학적 정의만 있죠.”
김형수는 1990년대 일본에서 장애인 지원 체계를 배워왔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우리 대학을 탐방해 장애인 지원 체계를 배워간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탐방을 올 정도로 연세대는 발전했고 장애인 졸업생도 늘어가고 있다. 김형수는 모교에서 받은 서비스를 모든 학교에 뿌리고 싶어 졸업 후 장애인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장애학생 대학 진학을 돕는 일에 나섰다. 연세대 출신 장애인들이 모교 교수로 채용되는 데까지 이르기를 소원한다.
“졸업한 뒤 ‘일단 대학에 장애학생이 많이 입학하게 돕자.’라는 데 뜻을 세웠고 모았고, ‘우리가 들어갈 때 정보가 없어 너무 고생했는데, 우리가 힘들게 얻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달할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게 되었죠.”
그렇게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는 2003년에 공식 출범했다.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학 내 장애 관련 동아리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입시 상담입니다. 그중에 저의 주 업무는 당연히 입시 상담이죠. 비장애학생들은 초등학교 6학년만 돼도 부모님들이 무슨 대학에 갈까 찾아보거든요. 그런데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교육보다 치료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서 30년이 넘은 특별전형제도의 존재를 몰라요.”
김 사무총장이 운영하는 ‘특별전형 지원자의 모임 SERA’란 온라인 카페는 회원 수가 무려 6천 명에 달한다. 대학에 가고자 하는 장애학생들의 궁금증을 대학 재학 중인 선배들이 해결해 주고, 회원들 상호 간에 멘토링 매칭도 이루어진다. 입시 컨설팅비는 무료다.
왜 사회복지학과만 가려고 하나
“장애학생은 인문대에 많이 진학했어. 공부하기 좋고 친절하지만 졸업 후 그들을 뽑아주는 곳이 거의 없어요. 보통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를 많이 선택하죠. 그러나 그 학과들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에요. 장애학생을 동료로 보기보다 서비스 대상으로 봐요. 차라리 건축학과 토목학이 낫죠. 저는 영화를 찍으려고 국문학과에 갔어요. 무거운 이엔지 카메라로 찍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스마트폰이 나왔어요. 미래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김 사무총장은 장애학생의 진로를 상담할 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곳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도전을 불안해한다. 그래서 김 사무총장은 부모님을 먼저 설득한다. 실제로 장애인이면서 자기 꿈을 좇아 과를 선택한 학생들 현실을 보여드린다. 현실적인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설득한다. 김 사무총장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선후배와 동기들과 함께 지도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 지도에는 후배들에게 요긴한 인생 항로가 제시돼 있다.
함께 사는 세상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 돼보고 죽습니다. 가족 중 장애인은 꼭 발생하죠.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투자에요. 출산율을 높이려면 장애아이도 부담 없이 낳아 키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중도장애인도 좌절감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대학에 다니며 공부하고, 고용과 연애에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이동권 투쟁을 할 때 우리 같은 명문대생이 연대해 싸워주면 시민들이 어떻게 볼까요? 지금보다는 훨씬 더 공감해 줄 거예요. 한국의 대학생들은 명문대 간판을 따면 특권이 생겨요. 피자헛에 후줄근한 모습으로 가는 것과 연세대 과 티를 입고 가면 반응이 달라져요.”
김 사무총장은 장애인 후배들이 당당한 정체성을 갖고 이동권 문제 해결을 위해 투쟁하는 분들과 연대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대학 시절 수많은 수업을 청강했다. 타 학과 학생들과 대화하고 친해지기 위해서다. 게르니카를 만든 것도 대학 진학 시에 전공을 정하는 게 어려워서 후배들의 시간과 열정이 낭비되지 않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현재는 과도기예요. 이제 우영우 같은 자폐인 역할이 나오고 실제 장애인이 단역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뜨기 시작했어요. 장애인도 에버랜드 가서 판다 투바우 같이 보고 여행도 할 수 있는 세계로 막 진입하려고 해요. 아이유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며 대중문화에서도 장애인을 동시대 이웃으로 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에 통합교육을 논의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장애가 심하면 특수학교로 가라는 말을 버젓이 나오고 있다.
“여전히 분리와 차별이 심해요. 특수학교에 장애학생을 몰아넣는 것은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장애학생을 가두는 거예요. 가장 심각한 상황이 비장애인은 장애인 친구를 모르고 장애인은 비장애인 친구를 모르는 거예요. 성평등을 위해 남녀공학을 장려하듯이 장애학생도 통합교육을 장려받아야 해요.”
김 사무총장은 장애인 친구를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임을 배울 기회가 없는 것이 사회적 불행이라고 강조한다. 장애인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것은 국가의 가치이자 의무다.
그는 후배들에게 꿈을 크게 가지라고 주문한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국내 장애인 문제 해결만 볼 것이 아니라 유엔에 나가 국제구호 활동도 해보는 거죠. 우리의 인권 문제 해결에서 세계 인권 문제도 해결하도록 스케일을 크게 가져보면 좋겠어요. 이익단체처럼 되지 말고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싸워주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앞으로 청년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자부심을 품고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김 사무총장에게 연세대는 ‘사람의 신뢰를 알게 해 준 곳’이라고 한다.
“사회문제도 재밌게 풀 수 있는 경험을 갖게 해 주었고, 글을 쓰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느끼게 해 주었어요.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면 원래 꿈인 영화를 찍고 싶어요. 게르니카를 만들면서 시작한 장애인 운동을 지금도 사회 속에서 게르니카 활동을 이어서 하고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해 본 시간이 없었어요.”
_글 황교진 / 연세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