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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Nov 03. 2020

내 마음을 와구와구 먹어줘

글 쓰며 살고 싶었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개봉할 당시 꽤 화젯거리에 올랐다. 아무리 잔인한 고어물이라도 제목을 저렇게 짓진 않을 거다. 듣는 것만으로도 뜨악스러운 이 영화는 사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연인과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제목에서 오는 거부감으로 여태 보진 않았지만, 꽤 서정적이고 감동적이라는 평이 많다. 지금까지도 티브이나 잡지에서 이 영화를 종종 마주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작가가 꽤나 관종이구나 싶었다(하다 하다 췌장을 먹겠다니). 무슨 내용이기에 저런 제목이 탄생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췌장은 소화 효소와 호르몬을 분비하는 작은 장기라고 한다. 위의 뒤편에 있어 잘 보이지 않고 병에 걸려도 티가 안 나지만, 암이 생기면 예후가 가장 좋지 않은 무서운 곳이다. 우리 몸에 그런 곳이 또 있다. 잘 보이지도 않고, 병들어도 자신 조차 잘 알아채지 못한다. 곪을 대로 곪고 나서야 겪어본 적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야 만다. 췌장과 성질이 참 닮은 그놈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아프면 죽기보다 괴롭다. 마음이 정말 정말 아프면 죽기도 한다.


 내 목에는 점이 하나 있다. 정수리에서 콧등을 지나는 선에서 딱 떨어지는 정 가운데에 있다. 어릴 적 누군가 그랬다. 여기 목 한가운데에 점이 있으면 자살할 팔자라고. 믿진 않았지만 찝찝했다. 나는 죽기 싫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게 넘쳐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먹고 싶은 건 또 어떤가. 그런 건 줄을 세울 수도 있을 지경이다. 당연히 가고 싶은 곳도 많아 하루가 24시간뿐인 게 가끔은 원망스러웠다. 오장육부의 기능이 다해 죽는 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숙명이겠지만, 그렇게 살다 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몹쓸 병에 걸려 갑자기 죽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있으면 약을 먹거나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속이 편했다. 늘 하고 싶은 일이 넘쳐나 기력이 쇠할 때까지 그중 반만 하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당연히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분이 오시는 날이 늘어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음이 어쩔 줄 모르겠을 뿌연 감정으로 넘쳐났다. 뭘 해도 내일이 없을 것 같고,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온몸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괴로운 날이 늘어났다. 불안했다. 이게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면 어떡하지, 이러다 정말 죽어버리겠다는 결심에까지 가닿으면 어쩌나, 두려웠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나약하게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한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이 자신을 압도해버리면, 아주 오래 지속되고 개선될 기미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으면, 그땐 정말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 이르는 게 아닐까. 그 정도까지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어 감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도 몸과 같아 악성 종양이 자리 잡으면 생(生)이 다해버리는 건 아닐까.



 아프면 고쳐야 한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가 회복탄력성도 좋은 사람이니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픈지 모르겠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떤 때 내가 괴로운지 모르겠어 미칠 노릇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모든 게 내게 등을 돌리는 듯했고, 나는 땅 밑으로 꺼져버리는 기분이 들었고, 그럴 때마다 온 힘이 빠졌다. 아직은 살고 싶으니 엉엉 울며 견뎌야 했다. 울고 또 울다 지쳐 잠들면 부은 눈을 걱정하는 다음날 아침이 왔다. 해를 보면 조금 나아졌다.


우울은 현대인의 흔한 질병이라 했다. 나는 그저 복에 겨워 아주 작은 불만족에도 성이 나서, 겨우 그 때문에 괴로운 건가 고민했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괴로운데 이유를 모르겠는 날이 늘어났다. 별것 아닌 일로 가족에게 짜증을 내고,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남편과 싸우다가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엔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정말 몰랐다. 내 마음이 그렇게 답답해 죽을 지경인 줄 몰랐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더러운 게 생기면 일단 마음에 던져 넣고 봤다. 마음은 이내 쓰레기가 잔뜩 쌓인 어둡고 퀴퀴한 곳이 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때가 되면 폐기해줘야 하는 줄 몰랐다. 더러운 게 차고 넘칠 때마다 워이 워이, 말하지 말라고, 참아야 한다고, 누르고 또 눌러 처넣었다. 마음이 아픈 줄 몰랐다. 새어 나오는 악취를 기를 써서 모른 채 했다. 그게 당연한 일상을 살았다. 남들 생각은 그렇게 잘하면서, 정작 내 마음은 보지 않고 듣지 않기로 아주 잘 훈련되어 가고 있었다.




 글 쓰며 사는 건 오랜 꿈이었다. 하물며 스스로도 '나 따위가 무슨 책을 낸다고'하며 콧방귀나 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책을 써서 세상에 남기고 싶었다. 내 마음이, 내가, 글을 쓰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조차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지만.



 속마음을 편히 털어놓은 적이 평생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으면서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조금이라도 내 의견을 내버리면, 그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착한 딸이어야 했고, 잘 해내는 사람이어야 했고, 긴장된 상황이 와도 티가 나는 건 안쓰러운 일이었고, 힘들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었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 더미들이 마음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었고,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히 내게 신호를 보냈다. 말을 못 하겠으면 글이라도 쓰라고. 그래서 뱉어내라고. 제발 좀 진짜를 말하고 살라고. 네 마음을 누가 읽게 하라고. 아니, 그냥 먹어치우게 내버려두라고. 와구와구 씹어 먹고 배설해 버리게 하라고. 네가 하지 못한 것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누가 괜찮냐 물어보기도 전에 앞서서 괜찮다고 억지로 웃으며 넘겨 버린 자잘하고 커다란 상처 더미들, 너를 힘들게 한 사람들, 네가 힘들었던 순간들, 나약해지고 싶었던 시간들, 그걸 다 써 버리라고. 언젠간 꼭 그렇게 해달라고 마음이 내게 애원했다.


 그러니 내 이름 석 자를 찍은 책이 나온다면. 그래, 그거면 여한이 없을 거라 늘 생각했다.



송인희의 매거진을 소개합니다.


<내가 제주에 사는 여행작가라니> 안물안궁 여행작가 일상잡다사 끄적끄적.

https://brunch.co.kr/magazine/jejutripadvisor


 <섬에 살다 보니 생각만 많아져요> 제주에 살며 솟아오르는 생각을 주섬주섬.

https://brunch.co.kr/magazine/thoughtsto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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