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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 Sep 26. 2021

언론고시와 작별하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다

SBS에서 떨어졌습니다. 펜을 놓는 순간 불합격을 직감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떨어져 있더군요. 오히려 후련했습니다. 이젠 정말 안녕입니다. ‘방송사’ 피디가 되겠다는 고집과도 작별입니다. 이런 식의 작별은 원하지 않았지만, 원래 이별이 다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별의 원인이 무엇인지 샅샅이 뒤지진 않으려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별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제게 지난 시간은 콘텐츠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시도였습니다. TV에 대한 시청점유율은 떨어지고, 프로그램 경쟁력 역시 뒤처지는데, 저는 아직 콘텐츠의 미래가 방송국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었거든요. 지금과 같이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에 대중들이 지칠 것이라고요. 그래서 어쩌면 다시 긴 호흡의 이야기를 보러 와줄 것이라고요. 그때까지 저는 제 자리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저는 알았습니다. 시청자들은 플랫폼을 이탈하진 않을 겁니다. TV라는 물리적 실체보다, 플랫폼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여한 ‘스킵’ 권한은 절대적입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옮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던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권한이 시청자들에게 있습니다. 이젠 압축적이고, 눈을 끌고, 밀도가 높은 다큐멘터리가 살아남을 겁니다.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심지어 개인이건 이 흥행 경쟁에 승자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콘텐츠 업은 지금 현재 가장 평등한 시점에서 경쟁하는 곳일 겁니다.


SBS 공채를 지원하며 그동안 가고 싶었던 미디어 스타트업에 콜드 메일을 넣었습니다. CEO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서 이력서를 넣었고요. 면접을 거쳐 합격했습니다. 1달이 지난 지금 저는 꽤 만족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회사는 생각보다 저랑 잘 맞았습니다. 막상 실무에 투입되니 저는 PD이지만 기획자이고, 커뮤니케이터이자 예술가라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PD인 겁니다. 여기서 저는 저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또, 좋은 팀원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콘텐츠 제작 과정이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우리 팀은 다음에 더 나은 모습이 될 거란 믿음이 감돕니다. 이 팀에서라면 넘어져서 코가 깨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제 예전에 다니던 회사의 과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제 개인 SNS에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어디에 다니고, 무엇을 하는지는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어디에 다니고 있는지 물으셨고, 제게 ‘잘했다’며 뜻밖의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약간 남아있었거든요. 특히 이 분과 함께하던 프로젝트에서 떠나 언론고시에 들어갔을 땐 더 컸습니다. 일은 모두 하고 싶지만, 제가 더 중요한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지금 제가 내린 결정을 존중해주시고, 제가 많은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잘한 결정이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제가 내린 선택은 충동이 아니어집니다. 


그렇게 언론고시를 떠납니다. 크고 작은 회사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진심을 다해 콘텐츠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할 겁니다. 몇 번이나 다시 보고 싶은 콘텐츠를 만들 때 까지요.


*저의 브런치는 제가 좋아하는 주제를 토대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하는 구조로 재편할 생각입니다. 음악, 공연,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그때 느낀 감정과 깨달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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