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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Sep 15. 2019

우리도 독일처럼, 시민사회 자성론 애써 외면하는 일본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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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320


#일본
#무라야마 담화

출처 : 시사저널(

http://www.sisajournal.com)


9월 1일 독일 대통령은 폴란드를 찾아 사죄했다. 80년 전 이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세계 언론이 주요 뉴스로 보도했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이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의 경우, 다른 관련 뉴스를 보도하면서 사죄 관련 내용은 본문 중 한 단락 정도로 짧게 요약해 정리했을 뿐이다. NHK방송에서도 홈페이지에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80년, 독일 대통령이 사죄’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지만 영상으로는 보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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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정권은 극우이다.. 이전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에 이은 무조건적인 항복 문서 조인 이후 , 평화 헌법을 제창하였지만 지금은 다시 원복 시키려는 노력을 배가하고 있고 , 전쟁이 가능한 일본으로서의 야욕 또한 불태우도 있다.. 


위 기사는 상반된 어찌 보면 70여 년 전의 전쟁의 상흔이 잊혀가고 당시 당사자들이 이미 떠난 후에라도 그 후손이 대통령이 되어 사죄의 뜻을 표하는 독일 대통령과,  짤막한 단신 기사 거리 하나 없이 8.15 패전 기념을 을 추도하는 그들 일본 , 상반된 입장이다... 그리고 점차 목소리를 높이는 진정성 잇는 일본 내 지식인들의 자성의 목소리에 귀달아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듯 한 행태이다.. 


종전 5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내용 중 아래와 같은 것이 잇다.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 담화에 기초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야말로 한·일, 북·일 관계를 지속 발전시키는 열쇠다.” 지난 2월 6일 일본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발표된 ‘일본 시민·지식인 성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발표한 이 성명에 226명이 서명했다. 이 성명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諸國)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음’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적 반목을 일삼아온 일본 , 그리고 이웃하여 지내는 한국은 어찌 보면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할 앙금 이어서가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그리고 현세대에게 제대로 된 반성이나 정리 없이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정치적 혹은 역사적 수치가 그들에게 있지 않는가... 


1923. 9.1일 방생한 간토 대지진에서 조선인에 대한 잘못된 유언비어 유포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고 ,, 이곳 조선인 추도비에는 6000여 명에 달하는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이 있다... 


역사적 상흔은 아픔으로 치유되는 것인가 , 아님 불인정에 대한 관용으로 치유되는 것인가. 오늘 우리 세대와 더불어 다가올 미래 세대들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책력 거 99. 



History of 칸토 대지진 - Wiki reference 


예측[편집]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 오오모리 후사 키치(大森房吉)와 이마무라 아키츠네(今村明恒) 사이에 다음과 같은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교수는 도쿄 남쪽의 사가미 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사설을 통해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아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실패했다. 특히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오오모리 교수는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 응력을 해소하여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도, 도쿄에서 1921년 말, 1922년 중반, 1923년 초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도쿄 지역에서의 대지진의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의 발생으로 오오모리의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1] 


경과[편집]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8 [2]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두 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 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방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 업소에서 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 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일본  #무라야마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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