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괴담회 제작일지 9.
리더십이 떨어지면서도 유독 '소통'을 강조하는 리더들이 있다. 왜 그럴까? 첫째, 나쁜 리더십의 선결조건이 자신에 대한 객관성 상실이기 때문에, 리더 본인은 자신을 좋은 리더로 착각하고 좋은 리더의 전범인 '소통'을 강조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다. 쉽게 말해,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식이다. 둘째, 자신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반추할 능력이 있는 경우는 본인의 무능력을 다소 깨닫고 있기 때문에 소통을 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는 경우다. 여기서 소통은 리더와 구성원, 구성원과 구성원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의 구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지시사항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달할 수 있도록 조직 내부에 일종의 모세혈관을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리더에게 소통의 개념은 일반적인 소통의 개념과 다르다.
그러면 팀을 이끄는 데 왜 소통이 필요한가? 팀을 단위로 하는 작업은 '물보라 치는 종이' 위에 홀로 펼쳐지는 고독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해나갈 때, '소통'은 팀을 원활하게 움직이는 가장 필수적이고도 효율적인 도구다. 내가 <PD수첩>을 연출할 때만 해도 이런 고민이 적었다. 연출진과 작가를 합쳐 5명이 넘지 않는 소규모 조직이고,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현장에서 피디가 얼마나 기지와 역량을 적절하게 발휘하는가에서 성패가 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야괴담회>를 연출하면서 녹화 때 많게는 7,80명, 평상시에 서른 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소통과 팀워크를 이끌어내려면 이런 고민이 들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과연 메인 PD로서 확실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가? 스태프들이 여러 가지 방향을 놓고 고민할 때, 올바른 해답을 제시했는가?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는가?
레귤러 프로그램 론칭 1주년이 다가오는 지금,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자문해본다. 나는 어떻게 팀을 이끌어왔는가? 잘 해왔다고 자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렇게 큰 팀을 이끌어본 것은 처음이고 이런 규모의 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초기에 터무니없이 고생을 하고, 아깝게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큰 사고는 없었으며, 모든 팀원들이 나름의 '끈끈함'으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음은 감사할 일이다. 내 역량이라고 한다면 이런 작가와 스태프들을 한데 엮었다는 점, 좋은 작가와 좋은 스태프를 만나는 운도 어쩌면 실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별개로 내가 꼭 명심하고 지키고자 하는 덕목들이 있다. 먼저 짧지 않은 피디 인생에서 "피디는 현장에 나갈 때는 전위에 서고 철수할 때는 후위를 지킨다"는 말을 모토로 삼아왔다. 항상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고 좋은 것은 양보한다. 출연자와 스태프들에게 감사의 염을 잊지 않는다. 녹화 당일에는 일찍 나와서 현장을 한번 돌아보고, 녹화가 끝나면 FD들과 소도구를 함께 정리한다. 완제 (전파를 송출하는 주조정실에 방송분을 넘기는 방송제작의 최종 단계)가 끝나면 방송분을 항상 주조정실까지 함께 가서 인계한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꼭 지키도록 노력해왔다.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연출하면서 명심하고 실천하려고 느낀 바를 따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 믿고 맡길 것. 권한을 일임하는 것과 방치는 다르다. 일단 일을 믿고 맡기되, 일의 추이에 따라 개입 여부를 결정한다. 개입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면 결과만 두고서 판단한다. 방송계에는 이상한 속설이 있다. 프로그램은 손을 탈수록 망가진다는 말.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모사 꽃과 같아서 손을 댈수록 움츠러든다. 의욕에서 혹은 초조함에서 자주 개입을 하려고 하지만 갑자기 상황을 개선해주는 마법의 조언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는 의도에서 온갖 조언을 건네는데 결국 도움은 안 되고 상황만 악화시키기 십상이다. 먼저 지켜본 뒤, 문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조치하는 게 옳은 방향인 것 같다.
둘째, 스몰토크, 유머감각, 침묵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것. 이것은 소통과 리더십에 앞서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스몰토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스태프 개개인에게 관심을 표시하고 잠은 잘 잤는지, 쉬기는 잘 쉬는지, 신체 컨디션을 체크해서 일을 배분하는 데도 유용하다. 그리고 작업상의 고충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유대감을 증대하고, PD의 고충도 직접 전달해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셋째, 금전 상의 손해를 감수할 것.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다면 PD가 써야 할 몫을 스태프들에게 양보한다. 제작비에서 PD들이 섭외나 교제에 쓸 수 있는 항목들이 있는데, 나는 보통 조연출들이 야근할 때 야식비나 좀 더 좋은 식사를 하도록 양보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끔 사비로 커피나 밥을 사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다. 사비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든 비용을 제작비에 전가하는 PD들도 있지만 내 지갑에서 꺼낸 돈으로 건네는 커피는 스태프들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또 PD가 자기 프로그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자세를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넷째, 고마움과 미안함은 신속히 표시할 것. 긴박한 상황에서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자아비판을 하자면 단순한 사안에서는 잘 실천해왔지만, 오래 묵은 갈등이 있고 난 뒤에 이런 감사와 사과의 표시는 더욱 어렵다는 점을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로 갈등을 풀어나가기도 했지만, 감사 표시라면 모를까, 오래된 갈등에서 사과 표현은 잘하지 못한 것 같다.
다섯째, 꼰대임을 두려워하지 말 것. 이 말은 꼰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평가에 위축되지 말고 목표를 납득시켜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요즘 MZ세대는 뭐라고 말만 하면 꼰대라고 부른다더라'면서 정말 해야 할 말을 아끼는 PD들도 있다. 하지만 팀을 위해서 때로는 냉혹해야 한다. 팀에 해가 되는 행동을 방치해서는 안 되고, 신속히 개입해야 한다.
여섯째, 최말단의 스태프에게 자존감을 심어줄 것. 가장 효과적인 행위는 그들에게도 팀의 결정에 참여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PD수첩> 때와는 달리, <심야괴담회>에서 나는 이 부분을 많이 놓쳤던 것 같다. 그 이유는 해야 할 일에 비해서 인원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선의로 그들에게 결정할 권한을 준다 해도 과중 노동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함께 얘기하고 관심을 보이고 염려하고 있음을 자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내 경험상,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믿어주는 만큼 일을 하는 것 같다.
일곱째,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것. 팀을 이끌 때, 제일 요구되는 덕목이 '사랑'인 것 같다. 인간애,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란 어렵다. 특히 나처럼 인간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또 사람에 의해서 치유된다. 연애가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팀을 이끌 때도 이런 진리는 변함이 없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을 알아도 그 배경까지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상, 내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덕목을 나열해봤다. 나는 이 덕목을 다 지켜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늘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리더십에 대해 고심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단위가 달라졌고 회사에서도 내게 요구하는 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잘 되는 프로그램이 있고 잘하는 PD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PD 한 사람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팀을 장악하고 말 한마디에 팀의 행방이 좌우되며, 심지어 PD에 대해 좋은 입소문 하나 없어도 잘 되는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리더십은 내 성격과 맞지 않고 시대와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다변화됨에 따라 말하고 책임지는 것을 넘어 잘 듣고 조율하는 일도 중요하게 되었다.
작년 초, 새 본부장이 왔고, 그의 취임 첫 일성은 '소통 강화'였다. 그리고 네이버에 카페를 만들었다. 21세기에 인터넷 카페를, 그것도 본부장이 종용해서 가입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이 카페는 공지사항만 일방적으로 게시하는 '흉가'가 되었다. 형식적인 '소통'과 실질적인 '소통'을 구분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다. PD, 특히 시사교양 PD는 항상 스태프들을 이끌며 리더십을 강제받는 직업이다. 심지어 처음 입사해서 말단 조연출이 되더라도 현장에 나가서 촬영팀 하나를 통제, 감독해야 한다. 요즘 나의 문제의식은 도대체 어떤 이런 소단위에서 확립된 리더십이 더 확장된 범위에서는 지리멸렬하게 되는가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머리가 굳는다는데,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라고 믿게 될까 봐 두렵다. '내가 잘하고 있다'라고 믿는 순간, '당신이 잘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곧 리더십의 악의이자, 아이러니 같다.
MBC의 위기는 곧 리더십의 위기다. 리더십과 조직 구성원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서는 채널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없다. 군대는 장군만으로도, 병사만으로도 승리할 수 없다. 나는 리더십에서 고르고 골라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고르라면 리더의 '메타인지'라고 하겠다. 내가 어떤 리더인가? 지금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사고하면서 자기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