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mini)'는 '작다'는 뜻의 그 미니이다. '벨로(vélo)'는 '자전거'의 줄임말이다. 미니벨로는 작은 자전거다. 크기로 분류하자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자전거의 바퀴가 29인치이고, 조금 더 작은 것이 26인치이다. 그에 비해, 미니벨로는 바퀴 크기가 20인치 이하인 자전거를 말한다. 원조격인 영국의 브롬톤(Brompton)은 16인치의 작은 바퀴로 굴러간다.
바퀴 크기가 20인치 이하의 자전거를 미니벨로라 부른다. 미니벨로가 모두 접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작게 접어서 이동하고 보관할 수 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폴딩 바이크(Folding Bike)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접이식 자전거'이다. 물론, 큰 바퀴 자전거 중에서도 접히는 자전거도 있다. 접히는 자전거라고 해서 모두 미니벨로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미니벨로는 접힌다. 그것도 예쁘게.
적재함이 제한적인 세단형 승용차를 가지게 되면 자전거와 공존하기는 힘들다. 사이클 대회 지원 차량처럼 위에 올리는 방법도 있고, 뒤쪽에 거치대를 다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필요할 때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럽고 번거롭다. RV형 자동차로 바꾼다고 해도 일반적인 자전거를 싣고 다니기가 쉽지 않다. 부지런한 분들은 바퀴의 일부를 탈착 해서 싣기도 하지만 그 정도면 마니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자전거로 가면 자전거로 와야 하고, 자전거는 자동차와 함께할 수 없는 분리된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미니벨로는 자동차와 자전거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이동 개념이다. 미니벨로를 타고 갔다가 상황에 따라서 접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되고, 누군가 태워 준다거나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내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라며 난색을 표하지 않아도 된다. 미니벨로를 접어서 트렁크에 넣고 같이 자동차를 타고 오면 된다.
미니벨로를 타고난 뒤에 그동안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가까운 도시로의 기차 여행도 다녀 보았고, 어디까지는 미니벨로로 갔다가 어디부터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어디서부터는 미니벨로를 타고 돌아오는 이동의 자유로움이 생겼다. 자동차를 타고 가기는 어중간하고 걷기는 멀어서 궁금하기만 한 채 가보지 못한 장소를 드디어 미니벨로를 타고 다녀왔다.
몸에 달라붙는 멋진 유니폼을 입고 쌩하니 옆을 지나가는 자전거 동호회의 행렬에 위축이 되기는 하지만, 입던 옷 그대로 헬멧 하나만 머리에 올리고 생각이 나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무격식과 무조건의 편안함이 미니벨로에는 있다. 그래서, 생각이 나면, 틈이 나면, 그냥 미니벨로를 끌고 나간다. 할아버지 할머니 뒷짐 지고 마실 나가듯이.
산악자전거로 험한 길을 달리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작은 동그라미 미니벨로로 겸손하고 얍삽하게 항상 좋은 길만을 찾아서 다닌다. 포장된 길이 최선이다. 매일 오후 느지막이 다녀오는 언덕너머 동네 카페 커피 라이딩도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따라서 느릿느릿 아장아장 다녀온다.
도로의 굴곡과 표면을 엉덩이로 느끼면서 작은 자갈도 요리조리 잘 피해서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니 도로 상황에 민감하고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느끼고 반응하여야 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도로를 주시하다 보면, 길 위에 떨어져 있는 작은 사물도 보이고, 심지어 길 위를 기어가는 아주 작은 곤충도 눈에 들어온다. 바람의 소리를 귀로 듣고 바람의 세기를 뺨으로 느낀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무심히 스치듯이 지나갔던 풍경을 느릿느릿 지나가며 눈으로 연속 촬영 버튼을 눌러댄다. 기억의 저장고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언덕을 넘고 고개를 지나다 보면 산과 들의 모퉁이에서 자연은 일정에 따라 꽃도 피고 진다.
언덕을 올라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허벅지에 통증이 올라올 때쯤이면 후회가 쏟아진다.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누군가 나에게 억지로 시킨 일이라면 눈알을 부라리며 거칠게 항의를 할 시점이다. 고행을 하는 구도자처럼, 목숨을 걸고 인생도 걸고 의지력도 걸고 인내심도 걸고 자존심도 걸고, 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서야 정점에 도달한다. 간사한 것이, 내리막이 시작되고 빠른 하강으로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장난으로 넣은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등을 타고 흐르면, 세상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 아~~ 인생은 아름답다.
요즘은 생각 없이 달리다가 본능적으로 움찔하게 되는 순간이 자주 있다. 계절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자동차에 깔려 죽은 로드킬의 흔적을 자주 마주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바퀴에 계속 눌려서 이제는 바닥의 무늬처럼 아스팔트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오래된 흔적이라고 해도, 자동차에 앉아서는 무심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는 그 위를 지나가기란 잔인하고 끔찍하게 느껴져서 핸들을 황급히 틀어서 피해야만 한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서 바짝 마른 채 한 장의 복사 용지처럼 바닥에 얇게 퍼져 달라붙어 있어도, 평소에는 느린 나의 두뇌가 갑자기 슈퍼컴퓨터가 되어 3D로 원래의 형상을 재생해 내는 바람에 모골이 송연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매번 로드킬의 흔적을 지나고 나면 "사는 게 뭔지?"를 느끼고, "허망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답다.
내가 자주 미니벨로 라이딩을 즐기는 길은, 신라시대 왕릉처럼 둥글고 낮게 펼쳐진 알가브 지역의 산봉우리와 멀리 대서양을 내려다 보며 해발 400미터쯤을 가로지르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면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 로드킬을 당한 뱀들이다. 뱀의 위험을 인지하고 피해서 살아남은 조상님들의 유전자 덕분에 무심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죽은 지 한참 되어 코팅된 뱀무늬가 되어가고 있는 뱀의 흔적에도 깜짝 놀란다. "아이 C"
책에서 읽기로, 여름철에 뱀이 도로 위에서 많이 죽는 이유가 밤에 따뜻하게 데워진 아스팔트 위에 올라와 있다가 자동차에 깔려 죽는다고 한다. 충분히 수용 가능한 이론이다. 하지만, 깔려 죽은 모양새가 아스팔트 위에서 찜질방처럼 노곤하게 졸고 있다가 깔려 죽었다기보다는 황급히 길을 가로지르다가 죽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형태들도 있다. 물론, 따뜻하게 아스팔트에 올라와 앉아 있다가 자동차의 진동을 느껴서 황급히 피한다는 것이 그런 모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미니벨로를 타고 길 위를 달리며 목격한 아스팔트 위에서 죽은 뱀들이 궁금했다. 특히, 길을 가로질러 거의 반대편 도로의 끝 부분에 도달해서 깔려 죽은 뱀들이 궁금했다. 분명 찜질방에서 졸다가 죽은 것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반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목적과 방향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멍청한 뱀들이 죽을 줄도 모르고 도로 위에 있다가 그냥 차에 깔려 죽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항변해 주고 싶어졌다.
길가에서 길을 따라 죽은 뱀도 있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스팔트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길을 가로질러 건너가던 뱀들이다.
우리 동네 아스팔트 포장길은 생태적인 관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난다. 한쪽은 물이 흐르는 계곡 쪽이고, 다른 한쪽은 정상이 있는 언덕 쪽이다. 여름철 태양이 산불을 일으킬 만큼 강렬하고 연중 가뭄에 시달리는 알가브 지역답게 작은 개울이 흐르는 계곡 쪽만이 잡풀이 우거지고 그늘이 있다. 그에 비해, 아스팔트 반대편 너머 정상 쪽은 땅이 바짝 마르고 바람에 토양이 날아가고 남은 부식된 잔돌이 뒹구는 척박한 땅이다. 풀도 없고 겨우 가뭄에 잘 견디는 뿌리 깊은 큰 나무만이 드문드문 앙상하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지글거리는 햇살을 피할 곳도 없다. 자연히 계곡 쪽에 양서류를 비롯한 다양한 생물군이 서식하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뱀들도 당연히 습하고 그늘이 많은 계곡 쪽에 서식하고 생존하기가 적당하다.
혹시 독특한 취향의 부모를 만나서 길 건너 정상 쪽 언덕에서 태어난 뱀이 있다면, 더 나은 서식 환경을 찾아서 계곡 쪽으로 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계곡 쪽 방향으로 가다가 죽은 뱀들도 있다.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현명한 판단이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시도하여야 하는 본능적인 선택이다. 물론, 계곡 쪽에서 올라와서 찜질방을 즐기다가 자동차를 피해서 계곡 쪽으로 다시 가려다가 미처 피하지 못해서 봉변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척박한 정상 쪽을 향해서 길을 가로질러 가다 죽은 뱀의 사체를 발견할 때마다 "이 놈들은 왜 이쪽으로 가다가 죽었을까?" 궁금해진다. 물론, 따뜻한 아스팔트 이론에 따라 노곤하게 쉬고 있다가 갑자기 자동차의 진동을 느끼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허둥지둥 산 쪽으로 피하다가 바퀴에 깔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곡 쪽에서 출발하여 상당한 거리를 기어 와서 정상 쪽 길을 거의 넘기 직전에 몸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아스팔트 위에 깔린 사체들을 보면 그쪽 방향으로 가고자 했던 목적과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나는 일기예보를 챙겨보고, 손끝하나도 추위를 느끼지 않게 장갑이고 핫팩이고 모든 준비를 해가며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자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관점에서는, 어디 높은 산에 갔다가 어디 극지방에 갔다가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의 반을 잃었다는 산악인이나 탐험가의 뉴스를 들을 때마다 "참 쓸데없는 짓 많이 한다."라고 반응한다. "요즘은 위성으로 보면 뻔히 눈 밖에 없고 얼음 밖에 없는 그런 곳에 왜 가냐?" "그래, 가서 뭐 할 건데?" "그래, 갔다 온다고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
“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Because it’s there.”
“왜 에베레스트를 계속 오르기 원하는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1924년 에베레스트로 마지막 원정을 떠나기 전에, 이전 세 번의 원정이 10명에 가까운 사망자만 남기고 실패를 했음에도 "왜 계속 에베레스트를 오르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1886-1924)가 던진 한마디다.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죽었고, "산이 거기 있으니까"는 산악계의 명언이자 전설이 되었다.
조지 말로리와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목숨을 걸고 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분석한 다양한 심리학적 이론들이 있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으로, 마이클 앱터의 전환이론으로, 그리고 경계행동이론 등으로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 그럴듯하고 적절한 분석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는 못 참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방금 북극을 탐험하고 돌아와서, 손가락 발가락이 성한 곳이 없고, 콧잔등에 시커먼 딱지가 앉은 채, 허연 껍질이 벗겨진 시뻘건 얼굴로, 담요로 뒤집어쓰고 앉아서,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수줍고 계면쩍은 미소를 띠며 "추워서 디질뻔 했어. 가보니 눈 하고 얼음 밖에 없어."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참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나는 뱀에 대해서 모른다. 뱀의 생태에 대해서도 모른다. 징그럽고 위험한 뱀은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스팔트 위에 말라죽은 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 나의 추측이고,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는 오만한 인간 중심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습도나 식물 분포를 보면 계곡 쪽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서식 환경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개구리 소리도 계곡 쪽에서만 들리니 먹잇감도 그쪽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뱀은 길 아래 계곡 쪽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산란하고 죽어갈 것이다. 안전과 풍요를 추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같이.
하지만, 길 건너 언덕 쪽이 궁금한 뱀도 있었을 것이다. 이전 기록에 의하면,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고 살기도 힘들다'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주 위험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어른들이 공동체가 사회가 국가가 말렸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궁금함을 참고 또 잊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뱀이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는 못 참는 뱀이 있을 것이다. 급기야는 어느 여름밤에 결심을 할 것이다. 처음 보는 아스팔트 도로를 보며 긴장이 되었을 것이다. 긴장되어 침을 꼴깍 삼켰을 것이다. 그리고는 냅다 달렸을 것이다.
아스팔트 위를 달렸던 어떤 뱀들은 길 위에서 죽었다.
어느 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온 뱀이 말했다.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멋있다.
꼬질꼬질 땀과 먼지에 쩔어서
동상으로 까매진 손발가락을 동여매고
새까맣게 탄 얼굴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나도 그렇게 말해보고 싶다.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푹신한 소파 위에 않아서 궁금해하지만 말고
안전한지, 이익이 되는지, 성공할 것인지,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따지지 말고
가보고 싶다.
아스팔트를 냅다 가로질러 가보고 싶다.
"야 추워서 디질뻔 했어. 가보니 눈 하고 얼음 밖에 없어."
못 참고 기어이 갔다 온 그 인간들이 참 멋있다.
"가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우리 인생의 끝에 꼭 무언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가 보니 꼭 무언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나도 한 번 가볼까?
싶다.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사람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은 기록을 남길 것이고
드물게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때로는 인류 지성의 빈틈을 메울 것이다.
지금도 산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