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보이지 않은지가 두 달이 되었다. 눈으로 보았지만 죽음이라는 개념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얼마 전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는 것이 믿기 어렵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너무나 얇디얇았다. 반투명 습자지 한 장이 나풀거릴 만큼의 긴 숨 한 번이면 충분했다. 한 인간의 목숨이 끊어지는 지극한 순간에도 물질세계에는 아무런 파장도 일지 않았다.
요즘 영상에는 모두 되감기 버튼도 있고, 다시 보기 버튼도 있는데 한번 일어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 현상이라는 게 어이가 없다. 요즘 세상에는 물건을 구입했다가도 원하지 않으면 반품도 하고 환불도 하는데 원하지도 않는데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나 보다 먼저, 세상 사람들이 '죽는다'는 현상의 의미와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당하기 힘든 죽음을 표현해야 하는 자신의 곤란함을 우회하고,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유족의 슬픔을 중화시키고,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식으로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망, 임종, 운명, 별세, 타계, 작고, 서거, 영면, 선종, 소천, 입적, 열반, 순국, 순직, 산화...
어떤 어휘를 선택하여 아내의 죽음을 표현한다고 해도 적절하지 않다. 나에게는, 어느 날 그냥, 아내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궁리를 하고, 어떤 방법을 찾아보아도, 아내를 다시 찾아낼 방법이 없다. 다시 만날 방법이 없다.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게 참 무섭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남아 있는 아들 딸을 위해서, "산 사람은 살아야지" 등등의 온갖 합리화를 통해서 건강에 좋다는 약도 챙겨 먹고 운동도 하며, 떠난 사람이 내려다보면 얄미울 정도로 온갖 재미를 찾아가며 오래오래 살아갈 것이다.
지난 36년을 둘이서 하나의 인생처럼 살았고, 노후도 둘이서 오래오래 함께 살 것이라 그려보며 살았는데, 한 밤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일시에 멈추어 서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정전이라 불을 밝힐 초나 랜턴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을 더듬고 있다. 삶의 냉장고에서 녹고 있는 물건들은 어찌해야 할지 대안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럴 때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면 차근차근 잘 정리해 주었을 것이라 싶으니 더 아쉽다.
예전에는, 정전이 되었을 때 아내와 같이 의논하며 대안을 찾곤 했는데, 이제는 어둠을 어떻게 밝힐지 의논할 사람이 없다. 나의 어둠을 자신의 어둠으로 여기고 같이 고민해 줄 사람이 없다.
겁이 많았던 아내는 어둠 속에서 나를 붙잡고 있었다. 똑같이 겁이 많은 나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두렵지 않은 척 용기를 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아가야 할 어둠 속에서 혼자 겁을 잔뜩 먹고 서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장에는 산다는 게 더 무섭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만 불쌍하다.
야속하게도
너무나 야속하게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여전히
지구는 돌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