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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Sep 01. 2021

'여백'하라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허(許)할 때 진짜 삶이 다가온다

빽빽한 걸 좋아했다. 가득 들어차야 안심이 된다고. 공간의 성김과 시간의 여백을 못 미더워했다. 여백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군중이 벌떼처럼 공간을 에워싸야 뭔가 그럴싸하고, 콩나무 시루처럼 시간의 간극이 촘촘해야 하루가 알차다고 믿었다. 그런 시공간이 일상으로 치환돼야 나태하지 않고 열정적이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점점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때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약속했던 지인들이 하나 둘 각자의 둥지를 찾아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떠나버리자, 나는 점점 외딴섬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때론 찾아갈 한 줌의 공간조차 없어 스스로를 외톨이로 여기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와이프와 아이들을 핑계로 공간의 귀환을 기피(?)했다. 북적거림과 소란스러움에 익숙했던 나는 갑자기 소거된 환경의 무색 소음이 낯설었다. 적잖게 당황했고 적잖게 충격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공간이 채워질 줄 알았는데, 싱크홀처럼 마음속에 광활한 구멍이 생겼다. 공간이 확장되자, 나도 뭔가 꿍꿍이를 찾기 시작했다. 뭐라도 채울 수 있는 꺼리들을 찾아서. 


허전함이 방어벽을 허물며 물밀듯이 들이닥치자 자신과의 밀당이 시작됐다. 여태껏 거들떠보지 않았던 내면의 소곤거림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주위의 소음에 방치되어 무시했던 나를 그제야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끔 스스로 술잔을 기울이며 자조와 한탄을 쏟았지만, 전과는 결이 달랐다. 그 대상의 화살이 외부가 아닌 나 자신이었기에. 그렇게 공간의 여백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헐거움을 채우는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물론 결혼 후 전만큼 공간의 확장을 누릴 수는 없지만, 이제 친구들을 만나도 각자의 여백을 존중하게 되었다.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시간의 여백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꽉 차게 산다는 것을 물리적 양으로만 재단했다. 꼬꼬마 어린 시절 생활계획표를 만들면, 으레 기상부터 잠들 때까지 욕심껏 일정을 채워 넣기 일쑤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큰일 날 것처럼 채우고 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시간을 유린하는 이들을 한량이라며 몰아붙였다. 서릿발 같은 내 마음의 시그널이 그런 만용을 용서하지 않았다. 물론 성실하다는 표표한 칭찬을 얻기도 했지만, 어느덧 시간에 구속된 나를 발견했다. 시간의 여백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다고 빼곡한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한 것도 아니었다. 후회로 점철되며 공허한 다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이도 저도 아닌 시간만 허무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어느덧 40대 중반의 길목에 접어들었다. 경험이 누적되며 연륜의 힘인지는 몰라도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무시했던 시간의 여백이 그것이다. 물론 물리적 시간은 결혼 전보다 훨씬 디테일해졌고 촘촘해졌다. 하지만 시간의 쓰임과 여백이 새롭게 다가왔다. 조이고 풀 때의 적절한 타이밍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천금처럼 주어진 느슨한 시간은 소중한 '성찰'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감정의 부유물을 그 시간에 녹이고 다독이며 결핍을 채워갔다.       




여백은 침묵과 배려의 힘이 서려있다. 팍팍한 인생살이라도 기죽지 않고 살도록 추켜세운다. 그 여백의 추동력이 좋다. 가령 누군가의 마음이 아프고 다독거림이 필요할 때 예전 같았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무엇 때문에 그러니? 누가 그랬어?" 라며 닦달하고 심문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너를 그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공식과 등치 된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여백의 묘를 빌리자면, 당사자에게는 정작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지도, 그리고 그런 여백이 존중받을 때 치유의 힘이 발휘될지도 모른다. 결국 여백의 힘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상당한 결과를 낳는다. 글도 그렇지 않은가.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여백으로 보여주면 독자의 방이 생긴다는 것을. 그런 글이 여운과 감동의 밀도는 더 높여주는 법이다. 여백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작가가 오래도록 인정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작가들이 여백을 채울 때 그들은 여백을 늘려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백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오지랖'이 여전히 주위에 많다. 나도 그 양단을 오간다. 여백이 필요한 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 장광설을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뒤돌아서면 아뿔싸 실수를 깨닫는다. '좀 더 기다려줄 걸...', '좀 더 헤아릴 걸...' 채근하고 보채면서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닌지 되새긴다. 그런 여백의 깨달음이 겹겹이 쌓일수록 인생은 더 깊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제 우리 '여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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