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주문을 외치다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일상의 행복을 지키세요~" CM송이 귓가에 맴도는 하루다. 광고 카피는 평범하지만, 수척해진 마음을 어루만지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행복'이란 말을 참 사랑한다. 대학교 소싯적 시절 짝사랑했던 여자 후배가 있었다. 당시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를 우연히 접하면서 '행복'이란 단어가 그때부터 마음속에서 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백조차 못했지만,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했네라."라는 사랑의 합리화가 어쩜 그리 좋았는지. 상처 없는 사랑의 귀결이야말로 짝사랑이 던지는 최대의 장점이다. 고백을 아꼈다는 후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감정의 여진을 남겨둔 당시의 선택이 훨씬 나았다고 위무한다.
'행복'이란 단어는 울림이 깊다. 되새김을 통해 찰지게 다져진 단어의 따뜻함이,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매일 감사일기를 노트에 꾹꾹 눌러쓸 때면 '행복'은 필수 단어로 등장한다. 하루의 다짐과 가족의 안녕을 바랄 때 (1) 가족과의 '행복'한 일상 (2) 아들의 '행복'한 성장 (3) 아내의 '행복'한 시간 (4) 나의 '행복'한 성찰을 노트에 박제한다. 2년 동안 매일매일 쓰다 보니, '행복'이란 단어는 나와 가족을 상징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행복'이란 단어를 연상하면, 마음이 활짝 갠다. 우중충한 마음의 그림자가 물러나고, 산뜻하고 말간 기운이 노크한다. 굳게 닫힌 마음의 창을 열면 '행복'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온다. '행복'이 던지는 마법의 순간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체념이자 두려움이 아닐까. 불행은 결과론적이지만, 체념과 두려움은 과정의 단어다.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체념을 집념으로, 두려움을 도전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이 바로 불행이다. '행복'은 얼마든지 의지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있지만, 통제가 가능한 상수값도 사방에 널렸다. 그걸 인지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정작 '행복'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이 지천에 깔렸다고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을 알현하기는 참 어렵다. 감정 기복에 따라 널뛰기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 저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행복'의 강도와 밀도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행복'은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인생의 주권(主權)이다. '행복'을 관장하는 주인으로서 행세해야지, 넝쿨째 굴러오기를 기다리는 '오매불망' 파가 되어선 안 된다.
여기 [굿 라이프]의 저자 최인철 교수가 '행복'에 관해 던지는 메시지를 찬찬히 뜯어보면 여운이 깊다. 구체를 담보하면서 실행을 채근한다. 여러 '행복 활동'을 병행하며 그 즐거움을 만끽해보기도 하고,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행복'을 재해석해봄은 어떨까.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CM송이 다시 귓전을 때린다.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부르는 마법의 주문처럼.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1) 명상하기 2) 운동하기 3) 친절 베풀기 4)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 추구하기 5) 감사 표현하기 6) 낙관적 마음 갖기 7)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8)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9)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10)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 전략들을 사용하기 11)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행복을 다루는 기술>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첫 번째 그룹은 ‘심리주의자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마음의 기술이다. 명상을 하거나, 감사한 일을 세어보거나, 부정적 사건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보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 그룹은 ‘환경주의자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마음의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애초부터 쉽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행복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예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기술을 자유자재로 그리고 균형 있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 굿 라이프 <저자 최인철> 中